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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1
미하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2월
평점 :
<모모>를 읽은 후 갑자기 그의 대표작들이 궁금해졌다.
'끝없는 이야기', 영어로는 Never Ending Story 라고 한다. 영어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영화 때문이겠지만.
현실계와 환상계를 넘다드는 독특한 구성이 우선 재미를 준다. 또한 책 속의 책이라는 진부한 기법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실제 책 디자인도 똑같이 처리한 점도 흥미롭다.
바스티안과 아트레유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바스티안의 상상 속의 자기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전개에 따라 둘 사이의 간극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1권의 주인공은 아트레유이며, 2권의 주인공은 바스티안이다.
이 작품은 넓게 보면 바스티안의 정신적 성장을 고양하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와 소통이 단절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결국 환상계에서 돌아온 후 바스티안은 다시금 아버지와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다는.
하지만 엔데는 결코 아동작가가 아님을 상기할 때 표면적인 주제보다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관계 회복을 주된 테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멀어진 바스티안이기에 오히려 상상의 세계에 탐닉하고 이어 환상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계를 망각하고 환상계에서 안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환상계를 위해서도 불행하다. 그 환상계는 바스티안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존재를 의지한다. 그래서 바스티안은 환상계를 구할 수 있었다. 진부한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어린 왕녀에게 부여함으로써.
바스티안이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환상계는 물론 그 자신도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다. 더 이상은 참다운 인간이 아니게 된다. 결국 현실과 상상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한 인간상임을 작가는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이제는 속도와 이익만이 인생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상상 혹은 환상(이것은 애우 포괄적이다. 문학과 온갖 종류의 예술은 이것이 기반을 두고 있다.)에 가슴을 열어줄 의사가 없다. 즉 환상계를 무너뜨릴 '무(無)'가 점차 확산되고, 마침내 환상계 전체에 퍼지면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기계로 전락하는 결과다.
바스티안은 자신과 환상계를 구하기 위하여 환상계에 들어가야 했지만, 다시금 동일한 이유로 환상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인간은 대지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생을 영위하는 존재다.
엉뚱한 느낌이지만 아트레유가 환상계를 구할 영웅을 찾기 위해 환상계를 헤매고 늑대인간이 이를 추격하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중간계를 헤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바스티안이 아트레유와 한판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미나스티리스의 전투가 연상된다. 영화로 인한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엔데는 서양 고대 민담에서 차용한 갖가지 상상의 피조물과 환상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사하여 의외로 장대하며 흥미로운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거기에 인간 존재의 깊은 균형을 이루는 두 요소 간의 조화의 중요성을 정교하게 삽이하여 자체로 빼어난 금자탑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흥미진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지나치게 서양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많이 담고 있어서 내게는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장애를 준 듯하다. 차라리 <모모>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탈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게 오히려 내게는 친숙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 같은 일부 동양 독자들의 불평일 뿐 서양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