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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김훈은 다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다. 4년간의 시차, 이전과 이후의 그는 변함없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당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그만큼 그의 자전거 페달이 주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환희와 좌절의 순간도 겪었다.
이제 그의 바퀴는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4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었던가. 늙은 것은 전국의 산하와 마을을 누빈 풍륜인가 아니면 그 길을 여는 허벅지인가. 어쩌면 훌쩍 떠날 촌음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 유명 작가의 허울이 주는 속박인가. 자전거는 다시금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횡적 범위가 축소된 반면 종적 깊이는 그 웅숭깊음을 더해간다.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둔 일산 신시가지와 김포 전류리 포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착잡하다. “강력하고 완강한 변하는 것들과 위태로워서 사소한 변하지 않는 것들”의 전복된 가치를 안타까워하며, 현대 도시문명의 특징인 “단절로서의 변화”를 “수용으로서의 변화”와 대비하여 사색한다. 일산 신도시만 가지고도 이럴진대 최근의 김포 한강신도시와 파주 교하신도시에 대한 작가의 소회는 더욱 궁금하다.
말라가고 있는 남양만 갯벌과 사라지는 염전 등 소멸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보면 아, 김훈은 영락없는 작가임을 깨닫는다. 슬픔에 대한 본능적인 친연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성공하거나 성공을 꿈꾸는 소시민들은 방조제에서 자연을 뒤엎는 인간의 힘과 개발의 부푼 희망을 웅변할 것이다.
방조제와 갯벌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 정리된 듯하다. 기존에 진행 중인 방조제공사(간척사업)는 아마도 새만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환경단체들의 맹렬한 저항과 환경파괴에 대한 정치권의 부담감은 신규 공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갯벌과 기수역(밀물과 썰물의 교차수역)에 대한 향후 과제는 기왕에 만들어 놓은 방조제와 하구언 처리에 관한 것이다. 강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영산강 중류로 고깃배가 드나들고 갯벌에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여 바지락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생을 꾸려갈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이 보다 아름답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 보전보다는 개발이 우선순위를 지녔다. 당장 배고파서 죽어 가는데 보전은 먼 훗날의 얘기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큼 되자 환경과 보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 시내의 수많은 복개하천의 복원 정책을 보라. 대세는 복원이다. 아, 그런데 내가 사는 동네의 조그만 하천은 언제나 복원되려나. 주변에 변변한 산도 공원도 없는 삭막한 주거지역인 그곳.
남한산성을 돌아보는 작가의 시선을 남다르다. 이미 소설의 구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나 보다.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었다...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고,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P.203~204) 작가는 남한산성을 통해 치욕도 삶의 일부라고 삶이든 역사든 온전할 수는 없음(P.208)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을 다소 모호한 소설의 숨은 목소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남한산성의 현질사든 아니면 아산의 현충사 등 이러한 아쉬운 기념과 추억의 자취를 반기지 않는다. 이러한 흔적은 태평성대에는 세워지지 않는다. 난세와 전란의 시기에만 추앙된다. 그래서 나는 충신의 등장을 원하지 않는다. 충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선호한다.
김훈이 차기작의 소재는 무엇이 될 까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에 답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양수리(두물머리)가 유력하지 않을까? 정다산. 치욕과 침묵이 함께하는 모순적인 내면과 외면의 압박. 작가의 펜끝이 언젠가는 다산에게 다가올 것으로 감히 예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