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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전
이형식 옮김 / 궁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통상 <롤랑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중세 프랑스의 서사시다. 역자가 굳이 '롤랑전'이라고 표제를 붙인 사유는 옮긴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으며, 동의여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다.
일단 번역을 거치는 시의 속성 상 원작의 향취를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서정시가 아니고 서사시(이를 무훈시라고도 한다)이므로 작품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등에 비하면 분량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에네이스>는 두툼한 책의 부피에 놀라서 책상에 널브러진 채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있는 신세다.
내용은 샤를마뉴(카를, 카를로스) 대제 당시를 배경으로 스페인 정벌과 뛰어난 기사 롤랑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시각에서 바라본 무훈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확실히 작품 전체에 걸쳐 중세를 압도하던 기독교의 정신이 충만하며, 롤랑과 그의 동료들, 적국인 사라센 용사들의 빛나는 무공이 전편에 충일하다. 광신과 잔혹은 고대와 중세의 공통된 특성이므로 문제삼지 말자. 오히려 신과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교도'들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황제마저 발리강의 칼에 투구가 박살나지 않았던가(261절). 적어도 그들에 대해서는 종교를 떠나서 용맹의 묘사에서는 공정함을 유지하고 있음이 이 작품의 덕목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렇게 단순하게 평가를 내리기에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다. 롤랑과 가늘롱의 대립과 이의 파생으로 롤랑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부분, 이것이 어쩌면 이 작품의 진면모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주요 인물의 관계 설정을 보자. 가늘롱은 롤랑의 의부(義父)이며, 롤랑은 샤를마뉴 황제의 조카다. 그리고 가늘롱은 황제의 매제가 된다. 즉 가늘롱의 처가 황제의 누이다.
그런데 롤랑과 가늘롱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먼저 사라고사 마르실 왕에게 사신을 보낼지 여부를 놓고 롤랑이 반대를 주장하자, 가늘롱이 이를 반박한다. "오만에서 비롯된 진언이 가납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미친 자들은 내버려 두시고, 현명함을 취하소서!"(15절). 결국 가늘롱의 진언대로 사신 파견이 결정되자 롤랑은 가늘롱을 적임자로 추천한다(20절). 가늘롱 백작의 고뇌하는 장면에서 이 임무의 중요성과 동시에 내재한 위험성의 크기를 유추할 수 있다. 자칫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전례(바장과 바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도 롤랑의 자신의 의부를 추천하였고, 주저하는 가늘롱을 비웃기조차 한다. 이것은 보통 인간관계에서는 있기 힘든 경우다.
이에 대해 가늘롱이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늘롱은 마르실 왕의 사신인 블랭깡드랭과의 대화에서 그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29절~30절), 사라센인의 손으로 롤랑을 제거하려고 계획한다(46절~47절). 그렇다고 가늘롱이 비열한 겁쟁이라고 매도한다면 오해다. 마르실 왕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장면에서 사라센인들이 감탄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참으로 고매한 신하로다!"
결국 샤를마뉴 황제의 군대는 마르실 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스페인에서 퇴각을 결정한다. 그리고 후위 부대를 남겨두는 문제로 한바탕 파란이 벌어진다. 이번엔 가늘롱이 롤랑을 추천한 것이다. 이에 황제는 "몹시 노한 기색으로...그대는 진정 악마로다"(58절)라고 하며 가늘롱을 비난한다. 롤랑 추천이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지 의아스럽다. 롤랑이 이 임무에 적임자라는 점은 황제가 신임하는 넴므 공작의 동의로 드러난다. 그런데 황제와 롤랑은 가늘롱에 악담을 퍼붓는다. "아! 비열한 자, 출신이 더러운 악당이로다."(60절). 즉 유추하건대 이 임무도 또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지난한 과업이다. 그러기에 롤랑이 가늘롱을 마찬가지로 비난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롤랑에 대해 살펴본다. 롤랑은 당대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는 용사이며, 동료 올리비에와는 굳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 올리비에는 롤랑 못지않게 용맹하면서도 지혜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올리비에가 롤랑에 대하여 "그대의 성정 혹독하고 오만"(18절)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후위대로 잔류하다가 사라센 대군에 의해 곤경에 빠진 롤랑에게 올리비에는 수차에 걸쳐 황금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황제의 본군을 되돌려 구원군으로 삼자고 조언한다. 롤랑은 이를 무시한다(83절~86절). 만약 이때 롤랑이 뿔피리를 불었다면 롤랑과 동료 기사들은 파멸을 맞지 않고 사라센은 대패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명한 조언을 거부한 롤랑은 역시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임을 보여준다. 나중에 롤랑이 태도를 바꿔 구원군을 부르겠다고 하니 올리비에는 그에 대해 야유와 비난을 쏟아붓는다(129절~131절).
역사는 힘센자에 의해 윤색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 강대국일수록 실패의 치욕을 숨기고자 혈안이 되곤 한다. <롤랑의 노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번 조작된 역사의 뒤집기를 시도하자. 먼저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이 7년간 지속되면서 아직 사라고사를 깨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세와 사기가 불리해지자 프랑스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가 대립한다. 황제와 롤랑은 주전파고, 가늘롱은 주화파라고 볼 수 있다.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황제의 군대는 퇴각하고, 적의 추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후위군을 롤랑이 지휘하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는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보편적 전술의 하나다. 그만큼 후위군은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결국 롤랑과 후위군은 몰살을 당하고 샤를마뉴는 장기간의 원정에도 성과없이 씁쓸하게 귀국한다. 한편 프랑스(기독교)의 자존심을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신성한 군대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이 패전의 배후에는 배신자가 있을 것으로 조작하고 주화파인 가늘롱을 제거한다. 그리고 서사시에서는 황제가 롤랑의 복수를 멋들어지게 해치우고 나아가 사라고사뿐만 아니라 전 사라센의 황제인 발리강 마저도 죽이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것이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황제가 가늘롱을 재판에 회부하자 신료들은 황제에게 가늘롱의 무혐의를 주청한다. 가늘롱을 "고결한 신하"(276절)라고 칭하면서. 이에 황제는 신료들을 "그대를 모두 반역자로다!"(276절)라는 반응을 보인다. 즉 황제와 신하들 간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가늘롱은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주전파의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의 종결은 깊은 여운과 슬픔을 남긴다. 가늘롱을 처단한 후 밤이 되어 이제 휴식을 취하려는 이백세 넘은 늙은 황제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 이교도들이 포위하고 있는 앵프 성을 구원하라고 전갈한다.
"황제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다. 그가 홀로 탄식한다.
"하느님, 저의 삶이 어찌 이리도 고단하나이까!"
그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그는 자기의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291절)
여기에서 기독교적 신성의 영광과 빛나는 무훈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 인터넷에서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에 대해 잠깐 찾아보았다. 사라고사는 피레네 산맥을 겨우 넘어선 곳에 있다. 스페인 중에서도 북동부에 있는 곳이다. 칠년 간 원정의 결과가 겨우 사라고사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면 치욕스럽기 그지없는데, 게대가 퇴각하다가 대패를 당했으니 더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샤를마뉴 황제는 내치에 힘썼다고 하니 참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깨닫는 바가 많다"(184절)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