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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라와 딤나 - 개정판
바이다바 지음, 이븐 알 무카파 아랍어 역,이동은 옮김 / 강 / 2008년 6월
평점 :
특별한 이력을 지닌 고전이다. 원전은 고대 인도(기원전)의 <판차탄트라>, 이것을 페르시아의 바르자위가 6세기에 당대 페르시아어인 파흘라위어로 번안하였으며, 또 이것을 이븐 알 무카파가 8세기에 아랍어로 번안하였다.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번역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끊임없는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시대를 초월하여 음미하고 교훈 삼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에 있다. 여기에는 작품 외형이 우화라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번안의 형태를 취하였음은 문화적 간극을 메꾸고 당대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서기 위한 방편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20세기 전후하여 우리를 되돌아보더라도 많은 번안 작품들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표제 ‘칼릴라와 딤나’는 첫 두 개의 장에 등장하는 재칼 친구의 이름인데,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큰 이야기이므로 번안 과정에서 표제로 삼은 것 같다. 칼릴라는 선한, 딤나는 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야기는 1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의 머리에는 다브샬림 왕이 현자 바이다바에게 희망하는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면, 바이다바가 그에 적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사자와 소의 장’은 “신뢰가 두터운 친구 사이에 간교한 모사꾼이 끼어들어 그들을 이간시키고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각 장도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여러 편의 짤막한 우화를 담고 있다. 즉 이야기가 이야기를 품은 액자 구조의 서술 형식이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길게는 수천 년 전, 짧게 보아도 일천여 년 전의 내용으로 보기에는 그 시의성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우화가 지니는 묘미다. 언뜻 동물들의 객담에 지나지 않나 싶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보다도 그 여운은 제법 길다. 그 잔잔한 메아리가 가슴 속의 반향을 일으켜 장구한 세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전 우화는 먼 옛적과 지금의 인간사가 본원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군신, 친우, 부자 간의 관계의 본질은 변함없으며 재화로 비롯한 계급 분화와 갈등은 여전하다.
<멧비둘기의 장>에서 큰 쥐의 신세타령:
“돈이 없으면 왜 그토록 비참해지는지 아시오? 가난이란 체면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체면을 포미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오....가난은 가장 모진 시련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갖은 멸시와 모욕이 빗발치는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소...”(P.193-194)
또한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원숭이와 숫거북의 장>에서 거북이한테 속아서 바다로 간 원숭이가 자신의 심장이 몸에 없다고 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우리의 토끼와 자라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전승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간단히 보더라도 우연한 문화적 공통으로 간주하기에는 제재와 구성의 유사성의 정도가 너무 크다.
우리의 현대 문화가 서구에 편향되어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등의 뛰어난 측면을 외면한 지 오래다. <칼릴라와 딤나> 또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수 년 밖에 안 되어 어찌 보면 서구인보다도 더 서구 지향적 우리 문화의 병폐의 예증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수용 과정과 그 이후의 묵수(墨守)적 태도를 볼 때, 우리는 지나치게 순수성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된다. 사상과 종교 등은 모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발명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네는 이를 절대시하여 이에 어긋나는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니 이단이니 하여 한 치의 유연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세기 후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데올로기가 천륜보다도 더 중시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구 문명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보다 많은 이들이 균형 잡힌 문명 시각을 지니고 국경 밖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바란다. 여전히 인도와 아랍의 고전 상당수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를 접하면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임을 각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