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4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평점 :
괴테의 <파우스트>는 세계 문학의 일대 걸작이다. 그런데 이 대작의 제재가 괴테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라 당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전설에 토대를 둔 것임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괴테의 걸작보다 200여년 이나 앞서 말로가 그려낸 이 작품은 보다 초기의 순수한 형태로서의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후대의 작품에 비해서 약 1/4의 분량 밖에 되지는 않지만 원형은 그대로 담겨 있다. 텍스트A와 B가 따로 전해져 약간의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데, 괴테의 작품과 비교하면 악마와 영혼을 대가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공통인 반면 괴테의 것에 등장하는 그레트헨과의 애사 장면은 없다. 또한 괴테는 악마에게 끌려가는 파우스트를 결국 구원하지만, 말로는 전설에 충실하게 그대로 지옥에 끌려가도록 한다. 여기서 이 주인공과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사고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두 텍스트를 비교하면 대체로 A가 기본 스토리에 충실한 반면 B는 A에 누락되거나 축약된 일화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놓은 점이 발견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교황을 찾아가서 브루노를 풀어주는 장면, 카롤루스 5세 황제를 방문하여 마술을 보이면서 무례한 한 기사를 놀려주는데 이 기사가 앙심을 품고 파우스투스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장면, 술집에서 말 장수와 짐마차꾼 들이 파우스투스에게 골탕먹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 이어 그들이 반홀트의 공작과 함께 있는 파우스투스를 찾아가는 장면, 약속한 기일이 끝나고 영혼을 데리러 악마들이 오기 직전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 악마들이 파우스투스의 영혼을 끌고간 다음날 학자들이 그 시체를 보게되는 에필로그 등이다. 이처럼 두가지 텍스트를 한데 합치면 보다 그럴듯한 구성의 작품이 된다.
파우스트 전설이 오랜 기간 동안 서구에서 관심을 끈 것은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대가로 마술에 탐닉하다가 지옥에 빠진다. 매 장면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의를 하고 후회를 하면서도 결코 결정을 철회하지 못한다. 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잘못을 회개하고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그것,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관념의 하나이므로 파우스트 전설을 통해 참된 종교[기독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한편 죄인 줄 알면서도 여기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쩌면 그 자체가 인간적인 면모, 이에 대한 르네상스 이후 작가들의 관심이다. 그래서 괴테는 파우스트가 말년에 와서 토지 개척사업을 벌이도록 매우 창조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의지의 강건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타락한 지식인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달관한 숭고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된다.
지옥으로의 나락과 천국으로의 비상, 이것이 말로와 괴테, 선후배 희곡작가의 선택 분기점이며, 또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가 빚어내는 인간성과 종교의 역전된 위상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