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윌리엄 새들러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공자는 일찍이 나이 마흔에 이르러 미혹되지 않았다(不惑)고 자술하였다. 그러나 21세기 벽두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마흔의 숫자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육체적 연령과 정신적 연령의 격차는 나날이 깊어만 간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끔 되었다. 내가 아무리 강변을 하더라도 외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싱싱한 향기를 내뿜는 젊은이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저 미약한 바램은 그렇게 추레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다.
 
각설하고 이러한 내적 동기가 불현 듯 이 책을 손에 들도록 하였다. 이제 평균 수명이 70세를 가뿐히 넘기고 있는 추세이니만치 대략 30년 정도의 삶에 대한 마음의 각오를 슬슬 다져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마흔 이후의 삶이 앞선 세대처럼 인생의 하강기가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하며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에게 환호 받을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이네들은 무슨 무슨 원칙을 들먹이기 좋아한다. 그래야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하여튼 그 원칙을 나열하자면, 중년의 정체성 확립하기, 일과 여가활동의 조화,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이다.
 
사실 그다지 혁신적인 내용은 없다. 다만 그동안 간과하거나 외면하였던 측면을 새로이 포장하였다. 중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내용, 지극히 기본적이다. 그리고 일 중심에서 벗어나 일과 가족, 자신, 공동체 간의 균형 모색, 행동과 성찰의 무게 이동 등. 하지만 누구나 아는 내용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생물이다.
나이 듦은 자랑이 아니지만 부끄러움도 아니다. 시대가 젊음과 활력을 우상화하다 보니 중년 이후의 삶은 비참한 것으로 지레 겁먹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혹자는 이에 반발하여 노년에도 청년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는 일찌감치 노년의 길을 서둘러 따른다. 환갑잔치를 거창하게 벌이던 때가 오래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된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 새삼 의미를 되새기게 된 것은 ‘일’에 대한 정의다. 일이란 비단 돈을 받고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P.118) 이에 따르면 여가활동, 취미활동, 관심 있는 것에 대한 공부, 지역사회 봉사활동 모두가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회사의 일과 나머지 일 간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중요하다.
 
저자는 언론에서 떠드는 ‘중년의 위기’는 기실 ‘중년의 자유 또는 해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라고 비판한다. 중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과 가정, 직장, 사회를 보는 시각은 20대 및 30대와는 다른 각도를 지니게 된다. 팍팍하던 일상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도 된다. 혹자에게 자유는 곧 불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기꺼이 독재와 억압에 자발적으로 헌납하고 통제된 안정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중년의 자유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과제이다.
 
만약 사회적 출세와 지위 확보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다면 인생의 불안은 많이 줄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도 대부분 지위 불안을 분석하고 있음은 현대인의 삶은 지위에서 파생된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다지 가볍거나 술술 넘어가지 않음에도 책장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현실적 필요성이 크다.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 그것은 강력한 동기 요인의 하나다.
공자가 나이 마흔에 불혹이라고 자술했던 당시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될까. 한 40세를 넘기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마흔은 오늘날 60세 정도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혹함이 많은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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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2.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