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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여인의 편지 - 발췌 ㅣ 지만지 고전선집 441
프랑수아즈 드 그라피니 지음, 이봉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흥미로운 서간체 소설이다. 사실 서간체 소설은 그리 흔한 형식은 아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간>을 필두로 루소의 <신 엘로이즈>,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 그리고 괴테의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나마 유명하다. 그 중에 내가 읽어본 작품은 괴테가 유일하다.
이 소설은 몇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위에 언급했듯이 형식상으로 서간체라는 독특성이며, 다음으로 제재 면에서 페루 여인이라는 보기 드문 배경의 인물과 제재를 채택하였다. 또한 내용상으로는 어떤가. 애정소설과 계몽소설의 절묘한 결합이 그것이다. 이것의 문학사적 가치는 후에 여성주의와 결합하며 특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작가 그라피니 부인은 계몽시대의 한복판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계몽철학자 볼테르와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알면 대충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용이하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정불화와 남편의 사별로 후반생은 가난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작품에 은연히 배어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녀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페루 여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본다. 일단 이국적 취미를 만족시키는 측면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낯선 미지의 세계에 커다란 흥미를 느낀다. 이는 신비성을 부여하는 효과도 있다. 또한 작가가 몽매한 프랑스를 자극하는 계몽적 각성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타자의 시각에서 프랑스의 잘못된 점을 발언하고 지적해야 보다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 받아들일 여지가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이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단 문학작품이므로 문학적 재미가 최우선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독자들의 예술적 감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외 다른 목적 내지 의도는 유명무실하다. 따라서 작가는 만이공통의 테마인 지고지순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 스페인의 침략으로 무너진 잉카제국의 신녀 질리아가 약혼자인 왕자 아자에게 보내는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질리아를 향한 프랑스인 데테르빌의 애정과 우정의 갈등.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삼각관계가 성행하는 연유와 별 차이 없다.
계몽과 애정의 절묘한 결합과 변주가 작품의 근본적 추진력이라면, 아자의 변심과 데테르빌의 우정, 여성주의 시각은 작품에 변주를 부여하는 양념의 역할을 한다. 특히 비유럽인이자 여성인 질리아가 바라보는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여성 문제의 날카로운 비판은 그것이 더욱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호소력이 높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작품이지만 현학적이고 난삽하지 않으므로 내용 이해와 작품 감상에 어려움이 없다. 다만 완역이 아니라 발췌역으로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만 번역된 것이 아쉽다. 완역은 후일을 기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