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하인리히 2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60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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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과 제4권은 전반보다 분량이 더욱 길다. 600면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과 양장본의 외형은 소설이 아니라 딱딱한 학술서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으로 속단하지는 말자. 통근시간 외엔 틈을 내지 못해 지하철 안에서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지만 읽는 도중에 지루하다거나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선 두 권에서 작가는 하인리히 레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순수하고 아련한 스위스 시골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다소 굴곡은 있지만 주인공의 소심하면서 열정적인 성격은 도시와 학교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숲과 호수의 자연에서 위안과 풍요로움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안나와의 풋풋한 사랑도.

후반부에서 하인리히는 시골과 스위스를 떠나 미술 수업을 위해 독일로 간다. 그 계기는 안나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안나와 유디트는 주인공의 사랑관의 극점인 동시에 접점이기도 하다. 순수함과 정신적 사랑, 그리고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육체적 사랑. 사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일방을 배제한 한 방향의 사랑은 건전하지 못하다. 하인리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

독일로 간 그는 미술 수업과 작품 활동 보다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우정과 애정세계에 관여하기도 하며, 대학 강의 청강에 흥미를 느껴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등 청춘다운 부주의함과 태만으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의 서서히 스러져가는 희망처럼 작품 전개의 톤은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다. 그런데 켈러는 여기서 모종의 장치를 마련한다. 즉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독자가 지나치게 하인리히의 처지에 몰입하는 것을 억제하며 교양소설에 부족하기 쉬운 다양한 사건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즉 동반자 두개골의 주인 쯔비한의 일화, 친구 리스와 에릭슨 그리고 아그네스와 로잘리에의 애정사, 사육제의 떠들썩한 정경 등 어찌 보면 그다지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우울한 유머, 가벼운 문체와 결합하여 어둡되 암울하지 않은 작중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제4권의 후반부에서 하인리히의 인생은 그야말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우연의 남발로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이 자체가 이미 허구인 만큼 심각하게 지적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의 습작의 가치를 알아본 백작과의 만남, 뜻하지 않은 유산 상속과 도르트헨에 대한 연모. 귀향을 꾸물거리다 마주치게 된 어머니의 쓸쓸한 말년에 대한 자책. 잿빛 공직 생활과 유디트와의 재회.

19세기에 씌어진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지니는 가치는 무엇일까? 스위스와 독일 사람이라면 조금 더 직접적인 공감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물설고 말도 선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여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은 젊은 영혼의 자유로운 삶의 모색과 치열함이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현상이기에 그렇다. 하인리히가 펼치는 신학적 관점과 소위 포이에르바흐에 감화된 사상의 편린을 언급할 때 오의와 진의를 해득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순정과 열정에 마음 한켠이 끌린다. 문득 이문열의 초기작이 연상되는 것은 어떠한 연유인지. 치열한 인생구도?

교양소설이라는 진지한 외피에 흥미를 못 느낀다고 하면, 지난 세기 시골과 도시에서 스위스인들이 꾸려가는 일상의 모습을 탐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꽤나 읽어볼 만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양태는 시공간적 배경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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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4.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