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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 1 ㅣ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9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평점 :
스위스의 독일어권 작가인 켈러는 이 작품으로 ‘스위스의 괴테’라는 찬사를 받는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다소 의아한 데 괴테가 비록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걸출한 교양소설로 선구자적 위치를 점했지만 괴테의 성명을 후세에 드날리게 한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로,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은 그의 본령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여튼 괴테에 비견될 평가를 받게 된 것으로 보아 그 작품의 탁월성은 충분히 예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국내 초역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대형서점의 서가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무수한 세계문학 전집은 무엇인가.
괴테와 켈러 등의 교양소설은 시대적 산물이다. 고전적 시민사회가 근대사상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때, 작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추론해 본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충분히 체감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사고와 가치의 지주 역할을 했던 시민사회가 구시대로 물러나고 있음에 대한 애틋한 비애. 불안하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기대로 충만하여 호기심을 이끄는 다가오는 근대에 대한 동경. 즉 비애와 동경이 교양소설을 전개하는 원동력이다. 교양소설의 명작이 괴테와 켈러는 물론, 노발리스와 횔덜린과 같이 고전과 낭만의 전환기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양소설은 20세기 들어 성장소설로 변모한다. ‘교양’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고 만 탓일까.
교양소설의 속성 상 주인공은 젊은이가 된다.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거쳐 한 인간으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 교양소설을 읽는 행위는 전기를 읽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전자는 허구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또한 역사적 위인이 아니라는 점이 구별된다.
이 <초록의 하인리히>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항상 초록색 옷만 입고 다녀서 붙은 별명이다.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하인리히 레. 그는 소심하면서도 열광적인 성격으로 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시골에서 외삼촌 및 사촌들과 함께 지내며 화가의 꿈과 천사같은 안나에 대한 사랑을 키운다.
기본 뼈대를 둘러싼 숱한 에피소드와 정경 묘사 등이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번역을 통해서도 원작의 재미와 분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음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점에서는 번역자의 공이 자못 크다. 여하튼 합쳐서 900면에 달하는 두 권으로 된 문학작품을 어지간해서는 독자에게 지리함을 안겨주기 쉬운데, 첫 권을 빠르지 않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저자의 또 다른 자아다. 일찍이 청년 시절에 발표하여 세간에 외면 받았던 이 작품을 그는 노년까지 붙들고 개작하여 명작을 낳은 것이다. 하인리히가 그림에 관심을 쏟았던 것처럼 켈러 자신도 인정받는 화가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전화위복이라고 하겠다. 그는 결국 후대에 추앙받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명성이 국내에도 퍼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