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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알퐁스 도데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꼬마 철학자>에서 상당 부분 표출되었던 팜므 파탈에 대한 도데의 집요한 천착이 <사포>를 낳은 원동력이다. 작가 스스로가 파리 시절에 겪었던 그 체험이 가슴 속에 강한 여운과 충격을 남겼던 것인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 누구라도 그녀의 매력을 외면할 수 없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인은 사내의 몸과 정신, 그리고 재물을 서서히 고갈시켜 파멸로 이끌고 만다. 그리고는 미라를 팽개쳐 버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이르마 보렐과 파니 르그랑은 여기서 멀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 형성이 이루어진다. 그중에는 상생의 관계뿐만 아니라 상극도 존재한다. 스쳐지나가는 관계에서도 상극은 피해야 할 텐데 하물며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함에 있어 상호 파멸로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비극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뭇 남성들이 팜므 파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함은 파멸의 고통과 추락에서 쾌감을 느끼던가 아니면 이미 심신이 마비되어 의지가 박탈된데 기인한지 모르겠다.
장 고셍이 화류계에서 사포로 불렸던 파니 르그랑에게 도덕적 정숙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외 파견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시잠깐 즐기려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점차 그에게 괴로움과 질투로 다가왔다. 즉 남녀 관계가 단순 육체적 단계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단계로 진전됨에 따라 순전한 독점적 소유욕이 충족되지 못함에 대해 마음 한구석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파니가 장 고셍에게 쏟은 헌신은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적어도 그녀는 장 고셍을 만난 이후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고 그에게만 충실하였다. 그녀의 과거가 깨끗하였다면 장 고셍과의 결합에 그리 큰 장애요인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 고셍은 파니를 떠나려다 결국은 가족과 약혼녀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다시 오지만, 파니는 그를 따라나서지 않는다. 사포로 살아온 파니가 사포임을 버리고 파니가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녀가 사랑하였던 장 고셍에게는 커다란 불행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벗어나지 못한 애욕의 굴레를 사포가 직접 벗겨준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보면 비판받을 만한 내용과 제재를 다루고 있다. 목동의 순수한 사랑을 기억하는 독자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 바란다. <아를의 여인>에서 출발한 도데는 <꼬마 철학자>를 지나고 여기 <사포>를 통해서 예술지상주의에 가까운 감각적 문장을 구사하여 사랑과 애욕, 남과 여, 정숙과 타락, 애정과 증오 등 인간(특히 남녀)에 내재한 지독한 집착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사포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여류시인이다. 그녀의 명성은 서사시의 호메로스, 서정시의 사포라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높았지만 애석하게도 현전하는 작품은 몇 편 남지 않아 명성의 실체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사포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멘토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성동성애주의자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레즈비언(레스보스 여인?)이라는 명칭은 사포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포는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용어로 전락하게 된다.
* 작품 해설과 책 뒤표지에서 잘못된 내용 전달이 있어 바로잡는다. 외교관 지망생 장 고셍 앞에 나타나 “당신의 눈동자 색깔이 마음에 들어요. 이름이 뭐죠?”라고 묻는 여인은 ‘흰 비단 레이스가 달린 스페인 수녀 복장의 여자’가 아니라 ‘이집트 여인’이다. 스페인 수녀 복장의 여인은 가면무도회에서 잘생긴 장 고셍에게 감탄한 뭇 여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