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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지엘라
알퐁스 드 라마르틴 / 책세상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는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영원한 예술의 소재다. 더구나 그것이 비극적 결말을 갖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라면 한층 더할 것이다.
라마르틴은 특히 슬픈 사랑의 구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라파엘(호반의 연인)>은 과연 사랑의 찬가이지만, <그라지엘라> 또한 이에 못지않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젊은 날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묘하게 섞여 있다. 갓 스무살 넘은 라마르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소녀와의 풋풋한 사랑의 추억이 여기에 그대로 녹아있다.
본질적으로 <그라지엘라>는 사랑의 이야기이지만, 사랑담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전반부는 오히려 주인공의 이탈리아 편력기 인상을 주며, 나폴리에서 친구와 함께 어부의 배를 타고 뱃사공 생활을 하다가 폭풍에 난파당하는 장면은 해양문학에 가깝다. 그리고 주인공이 도시문명을 벗어나 이스키아섬과 프로치다섬을 돌아다니며 자연 그 자체의 소박한 삶을 누리는 모습에서 언뜻 자연파적 가치관마저 풍긴다.
주인공과 어부 가족, 특히 그라지엘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은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소설의 낭독이다. 이전에 열정과 혁명을 다룬 책이나 타키투스의 저작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가족들이 모두 바싹 다가와 귀 기울이며 탄식하는 장면은 인위적 겉치레를 벗긴 순수한 인간과 그 사랑의 아름다움과 호소력을 웅변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육지로 떠난 주인공이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그들을 찾으면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며, 이윽고 사촌 체코의 청혼으로 가출한 그라지엘라와 주인공이 대면하면서 내재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진부한 사랑이라는 단어로로 오염되지 않은 문자 이전의 사랑 그 자체이며, 그것의 세속적 현현은 그들의 뇌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씩 사랑을 확인해 나가던 그들의 사랑은 부모님의 갑작스런 호출에 따라 주인공이 프랑스에 와있는 동안 그라지엘라의 죽음으로 허무한 종결을 맞이한다. 그라지엘라는 가출하던 날 프로치다섬에서 추위에 떨면 한밤을 보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라파엘(호반의 연인)>에서 라파엘과 줄리의 사랑은 육욕적 측면을 극력 억제한 관념적, 종교적 사랑으로 나아갔다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연령이 아직 10대이므로 풋풋한 내음을 드리운다. 이것이 과연 사랑인지 아니면 좋아함과 사랑의 중간단계인지 주인공 자체도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같이 있을 때 즐겁고 행복하다는 게 아닐지.
작중에 낭독되어 작품 전개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폴과 비르지니>는 비단 내용상뿐만 아니라 작품 형성의 측면에서도 작가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십대 소년 소녀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 장소도 프랑스를 떠나 이국적(인도양의 섬과 지중해의 섬)이며 또한 세속문명의 허울을 떨치려고 하는 점도 마찬가지인 동시에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 점도 그러하다.
주인공의 편력과 두 어린 연인의 슬픈 흔적을 더듬어 보려고 구글 지도로 나폴리와 이스키아섬, 프로치다섬을 마우스로 오르내리고 스크롤하여 줌인 줌아웃을 해보며, 그들의 사랑과 그라지엘라의 넋을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