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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 산책과 추억 - 지만지고전천줄 40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실비>는 국내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나 <산책과 추억>은 초역이다. 그런데 편집이 매우 절묘하면서 동시에 탁월하다. <실비>의 작품 성격이 바로 ‘산책과 추억’이므로.
<실비>는 이번으로 세 번째 읽는다. 처음엔 우려와는 달리 간결하며 소박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작품 속에 내재된 환상과 영원한 여인상이 압도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독서, 이제는 그의 잃어버린 고향과 시절의 산책과 추억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작품은 크게 네 번의 시제 이동을 수반하다. 12장까지 기본 시제는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의 회고와 추억이다. 신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사 두 줄로 환기된 잊고 지낸 시절. 화자는 그 추억을 찾아서 발루와로 향하여 실비를 만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2장은 어린 시절 아드리엔과 연결된 첫사랑의 상념을 되새긴다. 그리고 4장에서 7장까지는 수년이 경과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와 실비와의 산책과 에피소드를 회상한다. 이어 13장과 종장은 다시 세월이 흘러 오렐리와의 교제와 이별, 발루와에서 결혼한 실비를 방문한 현재 이후의 추억담이다.
화자는 비교적 짤막한 중편에서 유년 시절에서 청년시절을 거쳐 현재까지 시기를 폭넓게 그리고 있으며, 공간적 배경도 파리와 발루와를 오가며 그 사이 샹티이, 상리스, 에르므농빌, 데마르탱 등 화자 당시에는 이미 옛 정경을 상실한 고향의 모습에 회한어린 탄식을 그치지 않는다.
대개 네르발의 작품이 그러하듯 <실비>도 죽기 수년전에 씌어져 심신이 쇠약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던 때, 그의 심경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은 힘들 때 어릴 적 행복했던 시절을 상기한다. Belle epoch! 이 작품이 간결한 구성에도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산책과 추억>은 일종의 회고록이다. <오렐리아>와 더불어 그의 최후의 작품이다. 그리고 미완의 작이기도 하다. 발루와의 에르므농빌에는 루소의 묘가 있는데, 네르발은 루소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실비>에도 화자가 실비에게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소개하는 내용이 나온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직접적 영향이 이 작품에 엿보인다.
네르발은 스스로 삶과 작품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작가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자전적 글을 통해 네르발의 삶은 물론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작지만 귀중한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잠시 목차를 본다.
몽마르트르 언덕(1장), 생제르맹 성관, 노래하는 모임, 젊은 시절의 작품, 초년기, 엘로이즈, 북방 여행, 샹티이(8장).
전반부 3장은 화자가 방을 구하기 위해 교외의 생제르맹으로 나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4개의 장이 본격적인 회고록 내용이다. 마지막 장은 현재 시점에서 고향을 돌아보고 산천과 인물의 변천을 논하고 있다.
<산책과 추억>에서 정신적 위기를 겪는 네르발은 의외의 심적 평온을 가지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반추한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이. 촛불의 마지막 깜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