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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작은 성들 - 혜원세계시인선 21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윤영애 옮김 / 혜원출판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혜원세계시인선 21
<보헤미아의 작은 성들>과 <공상시집>을 포함한 네르발의 대표적인 시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네르발을 이해하려면 산문작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르발은 말년까지도 시에 대한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비록 그의 시 작품이 모두 명작으로 평가받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고, 결과적으로도 그러하였다.
그의 시 세계는 정신착란 발작 이전과 이후로 대별된다. 초기는 주로 자연과 친지에 대한 서정시 계열이라면 후기는 말기에 가까울수록 소위 <오렐리아>적이 된다. 물론 초기작도 어둡고 우울하며 미래를 예감케 하는 상념의 편린이 군데군데 반영되어 있어 화사한 맛은 별로 없다.
“다정한 마음, 조용한 미소의
어리디 어린 한 소녀
바늘로 너희 가슴 찌르고
놀란 눈으로 들여다보네.
너희들 자르는 흰 손톱으로 인해
너희들 발이 끊기고
부르르 떠는 촉각은
죽음의 고통 속에!......” (‘나비’ 중에서, P.68)
“그러나 어림없지, - 내 젊음이 끝났으니......
나를 밝혀 주던 부드러운 빛이여, 안녕 -
향기, 소녀, 조화......
행복은 지나가고 있었네, - 행복은 달아났지!” (‘룩셈부르그 공원의 오솔길’ 중에서, P.102)
네르발의 삶과 정신을 대변하는 단어를 하나 고르자면 그것은 바로 ‘낙오자(El Desdichado)’이다. 그의 삶을 회고하면 네르발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이며,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자이며, 사회에서 낙오자이며, 인생에 실패한 자이다.
“나는 어둠이요, - 홀아비, - 위로받을 수 X는 자,
폐허의 탑에 갇힌 아킨텐느 왕자 :
나의 유일한 별은 사라졌네 - 그리고 내 별이 총총한 루트도
멜랑콜리의 검은 태양을 지고 있네” (‘낙오자’ 중에서, P.148)
네르발이 자신을 패배자들과 저주받은 자들의 종족에 연결시켰다는 한 주석가의 평(P.161)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낙오자이자 패배자였다. 현실에 실패한 사람들의 대안은 흔히 현실을 포기한다. 네르발은 몽상과 환각 속에서 잃어버린 현실을 구하였다. 이성이 삶이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정신착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가 환각제를 복용하고 정신착란에 빠졌던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의 버림은 끊임없는 모성에의 갈구로 표출된다.
현재의 괴로움은 과거로의 회귀를 자아낸다. 과거의 첫사랑(아드리엔느), 어릴 적에 지내던 고향(발루와)로.
“그리고 높은 창가엔 한 부인이.
검은색 눈의 금발머리, 옛 의상을 입고.
어쩌면 다른 생애에서 내가 이미 보았을 여인!
그리고 지금 그녀를 내가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환상곡’ 중에서, P.58)
사랑의 실패는 영원한 여인상에 대한 헛된 집념을 남긴다. 아드리엔느, 제니 콜롱, 옥타비아, 오렐리아.
사회의 낙오자는 어떠한가. 파리, 프랑스를 떠나 이국을 동경한다. 그의 오리엔트 지향이 입증하는 대로. 그리고 유일신 기독교를 부정하고 범신론적 이교를 찬미한다. 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이시스와 오시리스 및 <공상시집>의 ‘미르토’, ‘호루스’, ‘앙테로스’, ‘델피카’, ‘아르테미’ 등이 모두 그러하다.
‘여호와여! 당신의 정신에 패배한 마지막 신이
지옥의 밑바닥으로부터 “오, 폭정이여!”하고 외치네,
그는 나의 조상 벨류스, 또는 내 아버지 다공이라네...” (‘앙테로스’ 중에서, P.160)
네르발의 <공상시집>과 <실비>, <오렐리아> 등의 산문작품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 네르발을 이해하려면 같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시집은 네르발의 작품세계에 대해 상세한 해설과 주석을 붙이고 있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