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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시클럽
샤를 보들레르 외 지음, 조은섭 옮김 / 싸이북스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칼리프 하킴 이야기/제라르 드 네르발
2. 해시시의 시/샤를 보들레르
3. 해시시 클럽/테오필 고티에
4. 해시시 소고/쟈크 드 모로
5. 해시시 하이 이야기/발터 벤야민
6. 해시시 묵시록/피츠 휴 러드로우
7. 해시시 심리학/알리스터 크로울리
<칼리프 하킴 이야기>는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와 더불어 <동방여행기>의 축을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이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점은 역시 오리엔트 지향적인 네르발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작품이 엉뚱하게 해시시와 관련된 이 책에 포함된 이유는 사건 전개에 있어 해시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있다. 칼리프 하킴은 미행 도중에 유수프를 만나 해시시를 접하게 되고 그 환상적인 효능에 빠져든다. 환각은 여동생 세탈뮐크에 대한 숨겨둔 사랑을 공개하도록 만들며, 와중에 수상 아르제방이 전횡을 일삼는 것도 알게 된다.
미행 중에 아르제방의 음모로 정신병자 수용소에 갇히게 된 왕은 엄숙한 외양과 언행으로 점차 정신병자들 사이에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 잡고 마침내 폭동을 일으켜 탈출에 성공한다. 다시 왕좌를 되찾은 하킴은 그러나 세탈뮐크가 보낸 자객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해시시 복용은 칼리프가 순수한 청년 유수프를 만나고, 정신적 각성을 이루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금지된 사랑의 도덕적 빗장을 열어젖히는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하킴이 죽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공식기록에서는 사망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목숨을 구한 하킴이 왕좌에 염증을 느껴 세속을 떠나 드루즈교를 창시하고 그 신도들이 레바논에서 드루즈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였고 한다.
네르발은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전설 내지 신화를 교묘하게 중첩하여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 드루즈인 - 시리아에 살면서 이슬람교와 관계 깊은 특수교인 드루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한편, 해시시 환각 상태의 칼리프 하킴이 유수프에게 말하는 여동생에 대한 사랑 고백에서 작가 자신의 여성관의 편린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누이가 남자와 몸을 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마치 신성모독처럼 혐오감과 두려움을 내게 준다네...그녀가 속세의 이름은 지녔지만 신성한 내 영혼의 아내네. 탄생하는 순간부터 운명적인 내 여자였던 것일세...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내 안에서 뛰고 있는 그 세상의 영혼을 강간하고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네...”(P.21)
네르발의 모성 동경은 제니 꼴롱과 그 아바타를 끊임없이 갈구하면서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고 있다.
19세기에 유럽에 들어온 해시시는 당대의 일부 문인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해시시를 다루거나 그에 영향 받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해시시는 인도대마를 농축 처리한 것인데, 마치 요즘 대마초나 히로뽕, 코카인 등과 같은 마약류다.
마약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폐해는 자못 크지만, 대마초에 대해서는 심심찮은 반발이 단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벼운 마약은 이성이 억누르는 정신의 자유를 확장시켜 상상력과 감성을 증폭함으로써 예술 실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테오필 고티에의 <해시시 클럽>은 해시시를 복용한 화자의 체험담을 기술하고 있으며, 샤를 보들레르의 <해시시의 시>는 해시시가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해시시, 아니 소위 환각제가 예술과 문학 창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보들레르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순수한 환상은 이성의 도구를 빌리지 못하면 아무 존재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 몽상에 빠진 채 끄적거리는 문장과 붓의 놀림이 어떤 표현의 결과물을 산출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창작한 본인이 뚫어져라 바라보더라도 난감할 텐데, 항차 정상인이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책은 해시시를 매개로 당대 및 후대의 관련된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미지의 영역과 체험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하지만, 호기심 보다는 해시시라는 약물에 의존한 예술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