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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 (보급판) ㅣ 지만지 고전선집 71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네르발은 그의 말년에 집중적으로 작품을 출간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지를 한 듯이. 그가 1851년에 발간한 <동방 여행기>에는 두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칼리프 하킴 이야기>와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가 그것이다.
다행이도 두 편 모두 국내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다. 전자는 <해시시 클럽>이라는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고 후자는 지만지고전천줄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다만 시리즈의 특성 상 원본의 약 70%를 발췌 수록하고 있다고 하니 일말의 아쉬움.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일화는 구약성경에 유래한다. 시바왕국은 오늘날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에 있던 나라인데 전성기에는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까지도 세력권에 넣었다고 한다. 하여튼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시바의 여왕이 사절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왕의 지혜를 시험하였다고 한다. 전설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에티오피아를 건국하였다는 내용도 전한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솔로몬 왕, 시바의 여왕 발키스(코란에는 빌키스로 기록되어 있음), 그리고 솔로몬 신전의 건축가 아도니람이다. 아도니람은 성서에 간략하게 등장하는 인물인데, 프리메이슨[석공 결사]에서는 석공의 시조로 간주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바의 여왕은 신전을 구경하고 솔로몬과 결혼하고자 방문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신과 같은 고귀한 핏줄이 아니라 야합의 출신임을 인식하고, 오히려 아도니람이야말로 카인의 후예, 성스러운 핏줄임을 깨닫고 발키스는 아도니람과 결합한다. 발키스는 시바로 돌아가며 아도니람은 나중에 시바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솔로몬을 떠나지만, 신전 건축의 장인 중 아도니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아도니람을 살해하고 만다. 한편 솔로몬은 시바의 여왕이 준 반지로 정령과 바람과 동물을 지배하며 차차 타락하게 되고 만다. 솔로몬의 파멸자로 예정된 역할을 결국 사후 아도니람이 수행한 것이다.
네르발 특유의 신비하고 비전(秘傳)적 속성을 지닌 인물이 아도니람이다. 그는 신전 건축의 총책임자로서 노동자들을 절대적 권위로 통솔하면서 타인들과는 달리 솔로몬을 업신여긴다. 유대의 전성기라는 솔로몬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그는 신전 건축의 절정인 놋바다 주물 작업에서 실패를 맛보고 홀로 용광로가에 머물다 유령같은 존재이자 자신의 조상인 두발가인을 마주친다. 그리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은 그를 따라 지구의 중심인 불의 성소에서 자신의 시원인 카인을 만난다. 카인은 구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들려주며, 아도나이(여호와)가 일으킨 대홍수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의 후손들이 지하세계로 들어가 숨어산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입을 통해 아도니람의 운명이 언급된다. 즉 아도니람은 “아도니람의 충실한 하인인 솔로몬을 파멸시키기로 예정”되어 있고, “네가 이 땅에 없게 될 때, 지칠 줄 모르는 노동자들의 집단이 너의 이름으로 결집될 것”이며, “언젠가는 노동자와 사상가들의 공동체가 왕들의 맹목적인 권력과 아도나이의 독재적 사제들의 힘을 꺾어놓을 것”(P.105)이라고.
네르발에게 동방 오리엔트 사상, 즉 구약과 이집트 신화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한차례의 동방여행 후 다시 한 번 동방여행을 꿈꾸었으나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이시스와 오시리스가 재현되며, 성서와 이교적 환상이 교차한다.
이 작품에서 네르발은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당대 시각에서 자신의 관점으로 독창적 재해석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식자계층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프리메이슨을 결부시켜 흥미진진한 구성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비록 깊은 작품성을 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색다른 시도는 상찬할 가치가 있다.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네르발의 주요 작품 모음집에 <불의 딸들>이 있다. 이것이 아도니람이 찾아가는 불의 성소, 불의 정령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불에 대한 숭배는 또한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아니던가.
한편 아도니람이 발키스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지칭하는데, 네르발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관계도 남매간이자 부부간이기도 하다. 또다른 작품인 <칼리프 하킴 이야기>에서도 칼리프가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시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고를 확대하면 제니 꼴롱에 대한 네르발의 사랑도 결국 같은 성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단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남매간의 사랑 같은. 신화와 전설에는 근친간 결혼이 가능하지만, 근현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네르발은 사랑하면서 괴로워하고 맺어지지 못하였던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드리엔느, 오렐리아 등은 상실한 모성의 그리움이자 제니 꼴롱의 분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