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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발 ㅣ 문학의 이해와 감상 58
이준섭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6년 3월
평점 :
우연이 일과성에 머물지 않고 필연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더이상 우연이 아니다. 네르발과의 조우가 그러하다.
제라르 드 네르발. 19세기 전반을 살다간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 당대에는 작품성보다 기이한 행동과 정신발작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사후 망각의 세계에 묻혔다가 20세기 전반부에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선구자로 각광받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라마르틴의 소설을 빌리는 과정에서 달랑 한 권만 들고 나오기 뭣해 별 생각 없이 옆에 나란히 놓인 책 <불의 딸들>을 같이 집어들었다. 단순히 표제가 흥미롭다는 이유로.
라마르틴에 이어 네르발의 작품을 읽으려고 하다 앞뒤 표지의 짤막한 소개 문구를 보면서 녹록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몽상과 광기로 쓴 작품이라면 더구나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는데, 일반 독자가 쉽사리 감당할 수 있을까 저어되어 먼저 그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다행스럽게 이 책이 여기에 부합된다. 문고판보다 약간 큰 판형에 면수도 100여면 남짓하다. 더구나 저자는 국내 유일의 네르발 전문가이니 더욱 신뢰가 간다.
저자는 네르발의 삶에서 유년기 부모와의 단절을 가장 크게 주목한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외가에서 자란 그에게 전장에서 퇴역한 부친의 군인적 태도는 불신과 적대감을 유발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상실한 모성에 꾸준한 그리움을 보낸다.
그의 삶에서 어머니 외에 또 다른 여인, 즉 배우 제니 꼴롱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성의 순수함을 결혼으로 깨뜨리지 못한 게 아닌가하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그녀의 이미지와 사랑은 그의 작품 속에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의 정신발작은 젊을 때부터의 몽상적 기질과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존재의 잇따른 상실, 작가로서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좌절감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실비>와 <오렐리아> 등이 모두 최만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술되었다. 아직 그의 작품을 실제 읽지 못한 탓에서 구체적 작품 내용과 성향을 알지 못하나 삶을 통해서도 대체적 인상과 느낌을 가질 수는 있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여러 작가들 중에서 그들의 삶이 작품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들을 보면 그 인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P.101)
즉 그의 모든 작품은 자신의 체험에 기반하며 그것을 몽상과 교묘히 섞어 버무린 것으로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구자는 물론 독자도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는 그의 문학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요약하여 소개하는 이런 유형의 소책자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