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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영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8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오정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평점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8
소년 시절에 한동안 러시아 문학에 몰입하였던 때가 있었다. 인터넷은커녕 모뎀을 이용해 겨우 PC통신을 하던 때라 관련 정보를 얻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여기저기의 자료들을 모아서 ‘러시아 문학의 흐름’이라는 러시아 문학 小史를 끄적거리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설익고 풋내기 같은 유치함에 우습지만, 그래도 정겨운 기억이다.
그 당시 나의 관심을 한 몸에 끌었던 작가가 바로 레르몬토프다. 그의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 한 편도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아 실제 그의 문학세계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련한 기억의 흔적만이 가슴 한켠에 자리 잡게 되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레르몬토프의 대표작 <우리 시대의 영웅[현대의 영웅]>이 두 군데 출판사에서 나왔을 뿐이고, 또 다른 소설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발췌 번역 하나가 전부다. 그의 시(詩) 문학은 과문이라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첫사랑은 추억으로 남겨야 아름답다는 속설이 있다. 당시의 감정과 환경이 훗날과 같은 수는 없다.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회는 실망으로 그치게 된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레 레르몬토프를 펼치는 솔직한 심경이다.
페초린은 영웅일까 아닐까. 언뜻 표제와는 상반되는 페초린의 삶과 행위를 돌아보면 떠오르는 의문은 숨길 수 없다. 작가는 왜 그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까?
이런 반응은 당대에도 많았던 듯, 작가는 서문에서 “극한에 다다른 우리 세대의 모든 악덕으로부터 구성”되었으며 “하나의 초상이지만 한 사람의 초상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페초린은 결코 긍정적인 인물상은 아니다. 여기에서 영웅 상을 끌어내려면 몇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먼저, 페초린 같은 이가 영웅으로 불릴 만큼 당대 러시아 귀족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음을 가리킨다. 즉 페초린이 그나마 그들보다는 낫다는 슬픈 의견이다.
혹은 페초린이 당당하게 자기의 악덕과 사고를 펼치는 대담성을 통해 전제적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보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도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비치기를 바란다. 비록 위선적일망정. 따라서 대놓고 나는 악인이다라고 선언하는 행동은 그만큼 어려우면서도 두드러진다. 모 CF에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페초린은 영웅의 자격이 충분하다.
또 하나 보다 극단적인 가설은 페초린 같은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근성의 소유자가 귀족사회의 주류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자는 해석이다.
페초린은 훗날 오블로모프와 같은 소위 잉여인간의 부류다. 그는 유복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개인적 자질을 지녔으면서도 이것을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유용하게 기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환멸과 냉소만을 가슴에 품은 채 삶을 허비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 불행인 동시에 사회의 불행으로서 개인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억압적 체제의 잘못이 크다.
“단지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의 원인이며, 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만을 압니다....체첸의 총알세례 속에서 지루함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그녀를 이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함께 있는 게 지루할 뿐입니다......제가 바보인지 악당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도 불쌍한 사람이다는 겁니다.” (P.58~59)
"슬펐다......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의 희망을 파괴하는 일 뿐인 걸까? 살면서 행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운명은 나에게 늘 다른 이들의 드라마를 결말짓도록 해 온 것 같아. 마치 내가 없으면 누구도 죽거나 절망할 수 없는 것처럼!" (P.167)
즉,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봉건적 구체제를 뒤엎고 페초린 같은 이가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구현하자는 것.
이 작품은 카프카즈[코카서스]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와는 다른 기후와 지형, 인종들이 살아가는 곳, 당대에서 이곳은 머나먼 변방이자 최전선이리라. 레르몬토프는 카프카즈에서 유배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에게 날카로운 설산과 황량한 초원은 자신은 물론 페초린의 심경을 대변하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