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의 아빠
알퐁스 도데 외 지음, 최복현 옮김 / 글읽는세상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작품을 찾아 읽는 여정에 마주친 책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프랑스 단편소설 명작모음집이다. 전문적인 문학 번역서라기보다는 눈높이를 약간 낮추고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겉표지에 나온 대로 “가장 소중한 당신께 읽어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용도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전체 4부로 하여 작품들을 지혜, 사랑, 행복, 희망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대체적 분위기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페데리고>는 한마디로 황당하지만 재밌는 작품이다. 노름에 빠진 귀족이 예수님을 대접하여 세 가지 소원을 받은 후, 이를 활용하여 본인은 물론 지옥에 떨어진 순진한 노름 희생자의 영혼을 구제하여 천국으로 이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압권은 지옥을 찾아가서 지옥의 왕 프루통과 벌이는 노름 대결 장면과, 천국 입구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하여 결국 천국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또한 죽음의 신을 골탕 먹여서 두 번이나 생을 연장하는 부분도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주목할 곳은 페데리고가 노름에서 무조건 승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깨닫게 된 사실, 즉 자신이 파멸시킨 젊은 노름꾼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직한 노름꾼”(P.19)이었다는 점. 이것이 페데리고의 영혼을 근본에서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르셀 에메가 어떤 작가인지 네이버 검색을 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척 흥미로운 작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이 책에서는 <착한 개>와 <금언>을 수록하고 있다.

소경 주인을 위해 소경을 바꾼 개를 배신한 나쁜 주인, 고양이가 개를, 생쥐가 고양이를 대신하여 소경이 되는데, 게으른 나쁜 주인은 거지 몰골로 개에게 나타나지만, 결국 생쥐와 소경을 대신하다. 생쥐가 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는 앞 못 보는 나쁜 주인에게 달려간다. 착한 개! 정말로.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예전과 현대가 다르다. 과거에는 부자간에 대를 이어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신분제 사회라는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탓이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숙련된 솜씨와 풍부한 경험으로 인한 노하우는 어린 아들에게는 존경스럽고 장차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다. 재벌가의 자식이 아닌 이상, 아버지의 직업을 승계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시골은 도시로, 도시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기를 꿈꾼다. 부자가 모두 함께. 이런 판국에 어설픈 아버지의 권위는 오히려 자식의 조소를 유발할 따름이다. 루시앙은 아버지 쟈코탱을 원망하지만, 문득 너무나 약하고 위태로운 아버지의 지위를 깨닫는다. 슬픈 아버지의 초상화여!

알퐁스 도데의 작품도 두 편이나 실려 있다.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과 <아를르의 여인>. 이미 도데 작품집을 읽었으니 새삼스럽지 않으나, 코르니유 영감이 웅변하는 옛것과 새것의 갈등은 요즘 되새겨볼 만하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장인정신이니, 친환경, 수제(手製) 등을 내세우면 더욱 각광받는 현실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결국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못 이긴다.

쟝에게 사랑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반추한다. 누구에게 사랑은 일부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부다. 대개는 여성들이 전부 아니면 전무를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방스의 쟝은 단순하며 순진하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있다면 그야말로 순애보로 대서특필될 만하다. 오히려 사랑을 방해한다고 일가족을 죽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련만.

앙드레 모르아의 <광산귀신>은 은광을 둘러싼 부패세력과 여기에 대항한 광산기사의 비참한 말로를 잘 보여준다. 광산귀신이 허위이며 거대한 빼돌리기의 위장막임을 알면서도 책임자들은 외면한다. 올곧은 사바티니가 본사에 이를 알렸지만, 그 후 사바티니는 광산업계에서 매장당하였다,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용감한 처사에 공로상이라도 주어야 하건만. 더 큰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악의 자행을 감수해야 하는 게 타당한가. 입맛이 씁쓸하다. 광산귀신이 저 먼 볼리비아의 산 속이 아니라 우리 사회 각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

단편소설의 거장 모파상의 작품은 의외로 그다지 읽은 기억이 없다. 여기에 수록된 세 편 <보석>, <시몽의 아빠>, <포로>와 이전에 읽었던 <밤>을 상기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보다 풍부한 그의 문학세계를 탐구할 생각이다. 죽은 아내의 지혜로운 재테크로 졸지에 갑부가 된 사연은 재미와 여운을 동시에 안겨준다. 아내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경이로운 노력을 기울였던가, 졸부 남편은 그 후 진정 행복에 넘친 삶을 누렸을까? 재혼한 아내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우 괴롭혔다고 씌어있으니 아닌 것 같다. 소시민 남편과 갑부 남편 중에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한 삶인가 생각해 본다. 물론 현대인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릴 수 없겠지만.

편모슬하의 자식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냉대는 그나마 차츰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그것이 매우 심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별이 아닌 경우에는 결사적으로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않았던가? 일본의 황혼이혼은 과거 유산의 슬픈 잔설(殘雪)이다. 시몽과 그의 어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하나, 타인과 사회의 차디찬 시선을 막아줄 아빠와 남편의 존재. 다행히 시몽은 좋은 아빠를 만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항상 그러할지는 알 수가 없다.

<포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로운 삼림간수의 딸이자 아내인 베르틴느의 행위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독일 병사들을 속임수를 써서 포로로 잡은 그녀. 하룻밤 머물고 그들은 숲을 떠날 것이다. 그녀가 독일군을 머물게 했다고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선량한 사람을 기만하였다. 단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현대에서 전쟁은 군대끼리만 하는 것으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대내외적으로 지탄받는다. 베르틴느의 가슴 속에 독일군에 대한 조용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문득 몸서리쳐진다.

샤를 루이 필립은 서민의 보다 일상적인 삶의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노인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을 뒤따른 노인의 사연이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된 일상을 생활할 수 없다. 먹어도 허전하며, 일 하다가도 멍하니 있곤 한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마냥. 부부가 동고동락하며 백년해로하면 서로의 몸과 마음이 반 정도 겹쳐지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이 떠나면 남은 사람은 반토막 된 심신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혼과 이혼, 재혼이 밥 먹듯 손쉬운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동생>은 출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룻밤 이웃집에 맡겨진 아이들의 웅숭깊은 생각을 잘 보여준다. 작년에도 동일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 후 막내가 생겼다. 그럼 이번에도? 자잘한 일상의 모습에서 평범하지만 소박한 가정의 모습, 그것이 참으로 정겹고 아름답다.

<순박한 사람들>은 중의적이다. 아내가 떠나간 슬픔을 호소하기 위해 방문한 이웃집 남자의 사연을 듣는 여성 화장. 그리고 문득 깨닫는 현실. 떠난 사람은 이웃집 여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남자도 함께라는 것을. 인생에는 행복보다 많은 불행과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그속에 찰나의 행복은 아침이슬처럼 영롱하다. 쟌과 이웃집 남자는 슬픔에 잠긴 채 각자의 인생 여정을 힘겹게 걸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행복과 대면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순박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야심에 찬 시골청년의 상경. 그는 힘겹게 분투하면서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이. 그의 성공가도에 지난 날의 인연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과감한 뿌리침.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라인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같은 순수문학은 물론 무수한 TV 통속극에 등장한 식상한 소재. 하지만 언제나 공분을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수와 코페의 <연애편지>도 마찬가지다. 시적 재능이 떨어지는 시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바친 여성의 생전 편지를 출간하여 화려한 명망을 누린다는 가슴아픔과 분노의 동시 유발. 일반적으로 이러한 유는 결말이 대체로 두 가지다. 자신의 죄악에 자책을 느껴 자멸하는 방향과 아니면 여인의 처절한 복수극으로 이어지는 방향. 코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인은 죽고, 마리우스 카반느는 여전히 당당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일상을 누린다.

프랑시스 잠의 <삶의 병>과 <인생여정>. 주인공은 작가처럼 시인이다. 자신의 분신인 듯. 마음을 좀먹는 불안에 시달린 시인은 시골로 떠난다. 거기서 순박한 시골여인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의 불안 증세는 씻은 듯 사라진다. 잠시 도시로 돌아간 시인의 귀에 들린 자신의 몰락에 대한 소문, 시인은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는 어머니에게 시골로 가자고 권한다. 창백하고 까칠한 도시인, 그들은 외관상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을 누리지만, 내면으로는 우울과 불안과 고독에 시달린다. 아이들의 아토피도 시골에 가면 대개 사라지듯이, 시골은 도시의 병폐를 치료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시골여인은 건강한 삶, 건전한 생활관을 가지고 시인을 건강하게 한다. 시인을 몰락한 게 아니라 삶의 질을 크게 업그레이드하였음을 도시의 속물들을 알지 못하리라, 영원히.

<인생여정> 역시 시인의 잊고 지낸 진정한 삶을 상기시킨다. 수호천사의 이끌림에 따라 그는 시골의 냇물과 숲, 개울 옆 무덤 가를 산책하며, 물총새의 하늘빛, 산비둘기의 솜털, 나뭇잎들의 속삭임, 첫사랑의 미루나무 여인 등을 회상한다. “가시덤불과 쐐기풀, 장구채풀이 우거진 조용하고 조그만 무덤 가”가 시인의 길이고 잠들 곳이며, 그의 산책 여정은 바로 그의 인생여정이다. 시인은 곧 우리들 자신이다.

J.A.위스타슈의 <산책 나간 두 개의 종>은 파리의 한 종탑 종들의 연대기다. 옛적에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준 그윽한 종소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계화된 모터로 작동하는 무감각한 소리로 변모하고 말았다. 성목요일 미사 후 교황의 축복을 받으러 여행을 떠난 종은 성토요일 미사 때맞추어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앙리에트 루이즈와 마리라는 두 종은 잠시 그들의 노정을 벗어나 자유로이 유럽을 종횡한다. 거기서 그들이 보는 것은 비옥한 들판과 푸른 초원, 은빛 바다, 종탑에 자유를 억압당한 종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자연과 인간들의 여유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도 생의 본질은 여전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구세주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었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슬프지만 그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버리고 사회의 엄혹한 현실에 눈뜨게 된다. 아이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이지만 어른 입장에서는 대견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상반된 감정을 품게 된다. 프랑수와 모리악은 <곱슬머리 금발>에서 아이의 실망감과 배반을 좀 더 극단으로 몰고 간다. 쟝 드 브레는 어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실제로 산타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그 확신이 깨지는 순간 확신의 정도만큼 배신감은 강해지는 법, 배신은 곧 반항으로 이어지고 그의 삶의 불행한 결과는 매우 극단적이다. 작가의 집요한 상상력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동생의 말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화자, 프론트낙은 위태롭지만 슬기롭게 고비를 넘어선 통상의 우리들의 어린 모습이다. 넘을 때는 몰랐지만 뒤돌아보니 가파르기 그지없는 능선이었음에 새삼 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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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