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지기의 개 지만지 희곡선집
로페 데 베가 지음, 윤용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의 대가이자 국민연극의 창시자인 로페 데 베가의 국내 두 번째 번역본 출간이다. 외국문학의 다변화 측면에서 경하할 일이다.

일단 당대의 극작품들이 그러하듯 로페의 이 작품도 운문 희곡 또는 시극 형태를 갖추고 있어 번역에는 언어적 제약 외에 장르적 한계라는 이중적 어려움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운문의 묘미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 작품의 번역본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 메시지 및 구성 등을 조금이나마 접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데 만족할 뿐이다.

이 극은 남녀 간의 사랑의 갈등과 결합을 다루고 있다. 사랑과 조건이 일치한다면 사랑의 결실에 방해 요소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조건이 불일치한다면? 특히 여성에 비해 남성의 조건이 월등히 뒤처진다면 그 사랑을 성사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이나 과학적 지식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개인적 자질이 우수한 여성(특히 외모)이 결혼을 통해 상위 계층에 편입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반면 우수한 남성이 상위 계층의 여성과 연을 맺는 것은 가족과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로페 데 베가는 바로 이런 경우를 그리고 있다. 젊은 여백작과 하인 신분인 그녀의 남자 비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여백작이며, 그녀에게 구혼하는 귀족들이 끊이지 않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비서에게 마음을 애태운다.

비서 테오도로는 어떠한가? 그는 젊고 패기 있으며 자신만만하지만, 출세를 위해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여인을 거침없이 버리는 비정한 남성. 훗날 스탕달과 드라이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유형의 선배 격에 해당한다. 테오도로의 여주인에 대한 감정은 당초 상하관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아나의 눈과 말에서 감정을 알아채고는 일순간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밀회를 위하여 심야에 방에 뛰어들던 그가 이제는 마르셀라를 외면한다. 그녀의 편지를 찢고는 스스로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천명한다.

“마르셀라는 참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P.63)
““나의 남편, 테오도로에게.” 뭐? 남편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P.77)
“진지하게든 장난으로든, 이제 내 이름을 당신 입에 올리지 말아요.” (P.110)

디아나 백작은 번민한다. 그녀의 내심에서 감정과 명예가 맹렬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심은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내면의 열정적 감정은 사랑을 최우선시 한다. 그래서 테오도로에 대한 그녀의 언행은 극과 극을 달리며, 냉탕과 온탕을 넘나든다. 일면 이해가 간다. 현대에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당대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귀족과 하인, 더구나 남성이 신분이 떨어지는 사례는 통상적으로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나와 같은 신분이었다면 그의 고상함과 우아함에 내 마음은 떨렸을 거야.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나는 나의 명예가 더 소중해. 나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에 대해 존중해 주길 원해.” (P.35)

표제 ‘과수원지기의 개’는 테오도로에 대한 디아나의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과수원지기의 개는 언제나 먹을 것이 넘쳐나 자신이 먹기는 싫지만, 누가 와서 가져가려면 사납게 짖어댄다. 디아나는 테오도로가 마르셀라와 사랑을 속삭이는 걸 견딜 수 없다. 맹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순간적 감정의 폭발과 차가운 이성의 자제. 곁에서 지켜보는 이에겐 영락없는 과수원지기의 개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시종 트리스탄의 기지로 신분을 위장한 테오도로. 더 이상 디아나가 명예심으로 고뇌할 필요가 없다. 테오도로와 결혼을 선언하는 디아나. 양심에 걸린 테오오도로가 진실을 토로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격. 그녀에게 이제 명예심은 불 꺼진 재에 불과하다.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동시에 어리석군요. 당신이 저에게 당신의 숭고함을 보여 준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저와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저는 당신의 천한 사회적 신분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색깔을 찾았어요. 기쁨은 신분적 고귀함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원하는 영혼의 결합에 있는 거랍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거랍니다.” (P.171)

작가는 사랑의 소중함을 강조할뿐더러 곁들여 세인들의 신분 지향적 태도변화를 꼬집고 있다. 테오도로가 하인이 아니라 백작의 자제라고 드러나자 모두들 앞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기에 급급하다. 일순간의 태도 급변은 이전의 상황과 대비되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신분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기사 이것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TV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소위 ‘출생의 비밀’을 보라.

모두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불쌍한 마르셀라. 그녀는 잘못은 테오도로를 사랑한 것 외에 없다. 그녀의 사랑은 배신으로 보답 받고 그녀는 강제로 파비오와 결혼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당대 사회에서 하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나를 그와 결혼시키는 거예요. 나에 대한 당신의 경멸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부추겼어요.” (P.156)

남녀 주인공의 진실한 결합이라는 해피엔딩에 열광의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지만, 마르셀라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디아나와 테오도로에게 환호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귀중함만 알지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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