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시드의 노래 대산세계문학총서 76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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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76

‘엘 시드의 노래’로 세간에 알려져 온 중세 스페인의 영웅 서사시다.

원제를 감안하면 ‘엘 시드’보다는 ‘미오 시드’가 보다 올바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주군의 노래’보다는 ‘나의 주군의 노래’가 더 명확하므로. 어쨌든 미오 시드 또는 작중의 캄페아도르 모두 주인공인 실존 인물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를 지칭한다. 작중에서는 ‘캄페아도르’로 많이 불리며, 그 외에도 ‘호시절에 태어나신 분’, ‘아름다운 턱수염을 가지신 분’ 등의 표현도 사용된다.

번역이 어려운 시 장르이지만 그래도 서사시므로 최소한 기본적 내용 전달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번역자가 운문에 기울인 관심의 정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산문 이야기로서 받아들인다.

이야기의 배경은 스페인이 아직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소왕국으로 분산되어 있던 12세기 무렵, 사라센 제국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이슬람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뿌리내리고 있다.

대체적 줄거리는 이렇다. 알폰소 왕에게 참소를 받아 추방된 미오 시드는 자신의 추종자와 더불어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지역을 정복해 나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지며 마침내 전략적 요충지인 발렌시아를 점령하여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그럼에도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없어 드디어 사면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 꼭지다.

후반부는 왕의 주선으로 내키지는 않지만 카리온의 왕족들을 사위로 맞아들인 미오 시드와 그의 사위들의 이야기다. 막대한 지참금을 탐낸 사위들은 비겁함이 드러난 걸 창피하게 여겨 미오 시드를 떠나고 아내들에게 모욕을 가한다. 분노한 미오 시드는 왕에게 재판을 요구하고 모든 명예를 회복하며, 딸들은 더나은 남편감을 찾게 된다. 이윽고 미오 시드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전체적 구성은 첫 번째 노래와 두 번째 노래가 창업을 다룬다면, 세 번째 노래는 수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구전문학으로서 원작의 묘미를 느낄 방도는 없지만 산문으로서도 전체적 이야기는 제법 흥미롭다. 미오 시드가 영웅으로서 전승되어 온 이유는 타고난 개인적 탁월성과 불우한 처지를 극복하는 뛰어난 업적, 그리고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가톨릭 세력을 확대하는 종교성이 결합된 후대 국토 회복 운동의 원조라는 측면이 결합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내와 딸들은 감금되고 전 재산은 몰수당한 채 국경 밖으로 추방된 기사. 이쯤되면 웬만한 이라면 자포자기할 법하다. 그러나 미오 시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화석화된 영웅상이 아니다. 딸들의 치욕에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이 작품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미오 시드가 미약한 처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이슬람 지역들을 차례차례 점령하며 캄페아도르로서 명성을 드날리는 과정에 있다. 오늘날 스페인 중부에서 시작하여 동남진하여 카스테혼 데 에나레스, 알코세르 점령을 시작으로 마침내 발렌시아를 획득하여 근거지로 삼고, 탈환을 노리는 모로코 이슬람 파병군을 격파하여 지배권을 확고히 한다.

미오 시드는 지방 귀족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능력으로 입신양명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이 그의 사위인 카리온의 왕족들이다. 그들은 고귀한 혈통을 자부하는 이들로서 오로지 미오 시드의 명성과 재산 만을 목적으로 결혼을 노렸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아내를 버리며 그에 대해 당당하다.

“우리는 카리온 백작의
고귀한 혈통으로
왕이나 황제의 딸들과
결혼해야 합니다.
하급귀족의 딸들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지요.
그녀들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권리를 행사한 것이니
우리는 더 높이 평가되지
나쁘게 평가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P.333)

“우리는 최고 순혈의
백작 가문 사람들이니,
미오 시드 돈 로드리고와
인연을 맺은
이 결혼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가 그의 딸들을 버린 것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녀들을 버림으로써
명예롭게 되었던 것이다.” (P.339)

이들은 자신이 결혼을 원했다는 사실을 슬쩍 외면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미오 시드의 고귀함과 카리온의 왕족들의 미천함이 대비됨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미오 시드는 영웅으로 살다가 평온하지만 당당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후의 역사는 미오 시드의 의의를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즉 미오 시드가 있었기에 발렌시아를 지킬 수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곧 발렌시아의 상실로 이어졌다. 아직은 가톨릭 세력의 힘이 그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왕은 미오 시드의 잔존 세력이 치외법권적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진해서 이슬람 세력에 발렌시아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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