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험
세르반떼스 지음 | 조구호, 임효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세르반테스의 최후 작품이다. 일단 탈고는 하였으나 최종 교정을 마치지 못한 채 그는 임종 하였고,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따라서 작가의 세심한 손길이 다소 미흡하여 산만하다는 인상이 곳곳에 드리워진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 (P.9)

그렇다.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다. 그렇다고 세르반테스답게 무겁고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재기발랄하고 곳곳에 유머와 해학이 넘친다. 이게 세르반테스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작은 활자로 빽빽하게 5백면을 훌쩍 넘기는 분량을 사실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으로 분책하는 것이 독자에게 심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일 것이다. 막상 책장을 넘기게 되면 다종다양한 모험이 잇따르기 때문에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품 속에 등장하고 전개되는 무수한 인물과 사건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진지하고 구축적인 작가라면 에피소드 하나 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편은 거뜬히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이므로.

세르반테스는 <사랑의 모험>에서 <모범소설>과 <돈키호테>의 스타일을 결합시키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편력 및 우연한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후자를, 그리고 에피소드들의 제재 즉 인생과 사랑이라는 점에서 전자를 계승한다.

주인공 뻬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는 북구 출신(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임이 밝혀진다)의 왕자와 공주인데, 각기 뻬리안드로와 아우리스뗄라라는 가명을 쓴 채 남매로 위장하고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의 목적은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성스러운 도시인 로마로 가서 서원하는 것, 즉 성지순례이다.

그들의 배는 폭풍우를 만나서 조난당한 채 북해와 발트해를 떠돌아다닌다. 야만족들의 섬에서 목숨을 뺏길 뻔하고, 얼음바다에 갇혀 죽음을 기다린 적도 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통해 더욱 단련된다.

여기에서 아우리스뗄라의 불세출의 빼어난 미모를 연모하는 덴마크 왕자 아르날도와의 경쟁 관계는 흥미를 배가하는데, 그를 포함한 야만족 출신의 안또니오와 여동생 꼰스딴사 등 개성미 넘치는 인물들의 등장은 소설에 재미를 배가하지만, 한편 혼란스러움과 산만함 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북구에서의 고난을 마친 채 마침내 포르투갈에 당도한 일행은 육로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로마로 입성한다. 여기서 작품의 분위기는 일대 전환한다. 전반부의 북유럽 장면이 신화와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면, 남유럽의 순례 길에서는 보다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요소가 강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집에서와 매우 흡사한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세 가지 축은 사랑, 순례, 신앙이다. 이 삼 요소는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인공들은 삼 요소를 지키고 달성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의 결실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우직하고 무모한기도 한 그들의 선택은 차라리 현실 세계의 불의와 부조리에 지친 작가가 꿈꾸는 참다운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작가는 사랑과 인간에 대하여 너그럽다. 늙은 뽈리까르뽀 왕의 아우리스뗄라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그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음험한 계획은 주인공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였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음에도 작가는 그리 비판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면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충분히 변명되는데, 사랑의 열정이 한 사람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 어떤 추리력으로도 사랑의 열정을 알아 맞출 수 없고, 그 어떤 이성도 사랑의 열정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P.266~267)

한편 당대의 사랑은 여인의 외모에 대단히 집중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아우리스뗄라의 비견할 수 없는 미모는 뭇남성들의 혼을 빼놓는다. 불행한 뽈리까르뽀 왕은 물론, 아르날도 왕자를 더불어 방랑하게 만들며, 네무르스 공작도 불원천리 달려오게 만들 정도다. 그런데 주술사의 저주로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시들자 상황이 변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랑이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듯,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사랑도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무덤에 도착할 때까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영혼 속에 많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 추한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것인가 보다.” (P.537)

이런 사례는 작가의 <모범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외적 아름다움에 빠진 구혼자는 아름다움의 상실에 실망하며 여인을 떠난다. 오직 진실한 구혼자만이 외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대로임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말대로 기적적인 경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의 시대나 21세기 현대의 우리 사회나 미모지상주의에 대한 선호 풍조는 변함없다.

이 소설이 <돈키호테>와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물 유형의 창조에서도 주제와 작품 전개의 집중력과 일관성 면에서 확실히 어수선한 인상이 강하다. 역시 작가의 죽음에 기인한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굳이 세계 최고의 명작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체로서의 재미를 찾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당시의 추세-작가의 <모범소설>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임을 이해한다면 보다 너그럽게 열린 가슴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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