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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 모범소설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모범소설 1>에서 작가가 자부했던 재미와 윤리 양 측면에서 가히 소설의 모범이라는 주장이 근거 없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가진 모든 재능을 쏟아 붓고 애정을 기울였(P.7)던 그로서는 자기과시가 아니라 역으로 지극히 겸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 나이 벌써 64세로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7)
1권에 이어 2권에 수록된 여섯 작품은 다음과 같다.
<사기결혼>
<개들이 본 세상>
<세비야의 건달들>
<말괄량이 아가씨>
<남장을 한 두 명의 처녀>
<관대한 연인>
<사기결혼>과 <개들이 본 세상>은 내용상 독자적이지만, 구성상 엮여져 있는 작품이다. 전자는 차라리 후속 이야기를 위한 도입부 성격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사기결혼>은 다소 평범하다. 촉망받던 군인 깜뿌사노는 사랑보다는 재산에 욕심을 부려 도냐 에스떼파니아와 결혼을 하지만, 여자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과 건강을 날린다. 하지만 재산상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한데, 이는 깜뿌사노 역시 여자를 속이기 위하여 가짜 장신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깜뿌사노는 친구 뻬랄따 석사에게 계속하여 자신이 재활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겪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개들이 본 세상>이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에 병원의 개 두 마리, 시삐온과 베르간사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베르간사가 자신의 일생을 시삐온에게 들려준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개의 삶도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히 견공(犬公)판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들이 인간처럼 사고하고 말을 한다는 허구적 설정을 바탕에 깔지만, 그 내용이 지극히 사실적이고 풍자적이다. 개보다 못한 인간, 인간보다 덕성에서 우월한 개를 대비하여 당대 스페인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파헤쳐진다. 고전과 현대를 잇는 우화 작품의 뛰어난 예라고 하겠다.
<세비야의 건달들>은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소설에 상당히 유사하다. 두 소년 주인공 꼬르따도와 린꼰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가출하여 길을 나선다. 각자 카드놀이와 도둑질 수법으로 생계를 이어나간 그들은 대도시 세비야로 간다. 빛과 기회의 땅으로. 세비야에서 그들은 악당 짓도 조직의 관리를 받아야 함을 알게 된다. 모니뽀디오라는 악인을 우두머리로 한 나름 치밀한 조직은 도둑질과 해결사 노릇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적정한 수준에서 경찰과 거래를 주고받아 사업의 안정도 도모하는, 단순한 무뢰배 이상이다.
그들의 은어를 적절히 나열하여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작가는 세비야를 비롯한 스페인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모니뽀디오와 그들의 무리는 사회의 어두운 층을 그물망처럼 뻗어나가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생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에게 덕성이 존재하며 신의 구원을 갈구하는 그들.
동양고전인 <장자>로 기억되는데, 춘추시대의 유명한 도척(盜跖)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도둑에게도 진정한 도(道)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지키는 도둑이야말로 대도(大盜)라고 강변한다.
어찌 보면 모니뽀디오 또한 도척의 말과 그리 멀지않다. 사회의 가치관이 전복되면, 선과 악, 의와 불의에 대한 기존 관념이 뿌리째 뒤바뀐다. 그래서 모니뽀디오와 그 일당처럼 자신들이 악이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정상사회는 아니다.
<말괄량이 아가씨>의 주인공 볼로니아의 꼬르넬리아는 표제처럼 그렇게 말괄량이는 아니다. 그녀는 외모와 그에 못지않은 정숙함으로 평판이 자자했는데, 명문거족 페라라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비밀리에 출산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진행자 돈 후안과 돈 안또니오와 엮이게 된다.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됨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말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바로 소위 ‘명예’를 지키는 것에 대한 가치의 중요성이다. 꼬르넬리아는 미혼 출산을 함으로써 벤띠볼리 가문에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안기게 되었다. 그래서 오빠 로렌소 벤띠볼리는 가문상의 고귀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라라 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려고 한다. 그리고 두 명의 스페인 기사는 매 고비의 순간마다 스페인 기사답게 명예의 소중함에 손을 들어준다.
또 하나는 작가의 스페인에 대한 자긍심이다. 작가는 곳곳에 스페인 기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문구를 집어넣는데 부지런하다. 하나만 예를 들겠다.
“당신을 통하여 저는 스페인 사람의 호의와 예의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은 생각했던 것처럼 매우 숭고했기 때문에 한층 더 빛나게 될 거예요.” (P.258)
세르반테스는 일찍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그의 극작에도 열정적 애국주의를 담은 <누만시아> 같은 작품도 있다. 작가가 당대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변함없는 듯하다. 이러한 사랑이 그가 회의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 낙관주의 밝은 세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 게 아니겠는가.
<남장을 한 두 명의 처녀> 역시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나 저나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데 사랑 이야기만한 게 없다. 이 작품이 두드러지는 점은 여주인공이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에 나선다는 데 있다. 떼오도시아는 순결을 바친 마르꼬 안또니오를 찾으러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레오까디아 역시 사랑을 약속한 안또니오를 찾으러 고향을 떠난다. 두 여성 모두 순결과 정숙을 제일 덕목으로 삼는 당대 가치관의 기준에서 보면 파격적 행동을 보인다.
우연히 떼오도시아의 오빠 라파엘과 동행하게 된 그들은 싸움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롭게 된 안또니오를 만나게 된다. 두 여성의 동시 구혼, 그리고 안또니오의 선택. 레오까디아의 절망과 라파엘의 구애. 그리고 마지막 양가 아버지들의 결투 에피소드는 덤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 받고, 명예는 명예롭게 지켜진다. 그래서 한순간 실망과 슬픔은 존재하지만 결국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이 작품집에서 나타나는 사랑 이야기의 전형이다.
<관대한 연인>은 다소 스타일이 다르다. 여기는 작가 자신의 참전 경험과 포로 체험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 그 세부 묘사는 상상적 허구만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
사랑은 복수형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일치할 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런데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을 바라보고 나를 외면한다면 무척이나 슬픈 경우이다.
리까르도의 레오니사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다. 그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터키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다. 시칠리아에서 포로가 된 그들은 운명의 장난으로 멀리 키프로스에 노예 상태로 끌려온다. 레오니사의 미모에 전임총독과 신임총독, 그리고 최고법관의 삼자가 모두 욕심을 부리며, 중간에 레오니사와 리까르도는 각기 부정한 사랑의 중개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비로소 상대의 진심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안전하게 그리고 수많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그들. 응당 리까르도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을 레오니사의 선택에 양보한다. 그리고 레오니사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자유로운 의사로 리까르도를 선택한다.
이 작품 또한 주인공들의 인생 편력과 역경이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다. 세르반테스는 단편 분량에 장편에 걸맞은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력과 입담이 부족한 작가라면 갈고 다듬어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끙끙거릴 텐데 말이다.
<모범소설>은 <돈키호테>에 못지않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돈키호테>를 읽은 지가 까마득하지만. 12편에 수록된 다양한 인간과 사회의 군상은 당대 스페인 사회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와 장소가 다르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보편적 인간상의 재현이다. 더욱이 작품 전체에 내재된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당대와 이후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이며, 소토마요르의 작품집처럼 표제를 모방하는 사례도 생겼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이 <돈키호테>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주요작품들이 잇달아 번역 출간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서양문학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최소한 언급도 안 될 형편없는 수준의 작품이지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