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 모범소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돈키호테>로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중단편 소설집이 바로 <모범소설>이다. 그러데 작품명이 주는 선입견 탓인지 그다지 인구에 회자되지 않으며, 섣불리 읽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표제로 손해 보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모범’이라는 어휘가 원래 그러하다. 네모반듯하지만 개성 없고 재미없는 인간 유형처럼, 이 작품집도 그러하지 않을까?

작가는 왜 이런 타이틀을 붙였을까?
“이 소설들은 앞뒤 없이 막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작품들에서 보게 될 사랑의 밀어들은 매우 정직할 뿐더러 이성과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조심성이 있든 없든 이 소설을 읽게 될 어떤 독자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독자들께서 작품을 잘 읽어본다면, 그 속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교훈이 없는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제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작품들은 아마도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번역본 <모범소설 2>에 수록된 작가의 머리말에서 세르반테스는 실로 대담무쌍한 발언을 한다. 이 작품집이야말로 재미와 윤리 모든 측면에서 가히 소설의 모범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집은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말이다.

이제 작가의 주장이 독단적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차례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
<피의 힘>
<유리석사>
<집시 여인>
<영국에서 돌아온 여인>
<고상한 하녀>

이상이 1권에 수록된 여섯 작품들이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그의 8편의 막간극에도 동명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만큼 이 소재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음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바로 인간의 탐욕, 즉 욕심이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노인 까리살레스가 10대 중반의 레오노라에게 끌려 청혼을 하는 것 자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탐욕이며, 가난한 레오노라의 부모가 까리살레스의 재산을 보고 결혼을 허락한 것도 결혼의 순수한 의미에 역행하는 욕심의 발로다.

까리살레스가 레오노라를 타인의 시선에서 감추기 위하여 벌이는 삼중 장벽에 수많은 조처를 보자.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동굴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처사인데, 이 또한 레오노라를 홀로 독점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닌가?

레오노라를 정복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는 로아이사는 어떤가? 그는 사랑과 열정의 포로가 된 것도 아니다. 레오노라에 대한 그의 집념은 오직 비장해둔 보물을 훔치려는, 또는 순결한 정조를 뺏는 기쁨을 누리려는 불의한 욕망에 기인한다.

탐욕의 결과는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까리살레스는 슬픔과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며, 레오노라는 수녀원에 들어가 버렸고, 로아이사는 유언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다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레오노라를 비난할 수 없다. 그녀는 더럽혀진 욕망에 의해 노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게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움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다. 새장 속의 새가 아닌 보다 인간다움에 대한 갈구.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로워지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는 열쇠와 굳건한 문 그리고 담들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P.81)

<피의 힘>은 다소 작위적이다.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사고를 당한 아이를 구한 이는 다름 아닌 생조부였다. 여인이 아이를 찾아간 곳에서 자신의 과거의 장소임을 깨닫고 자신과 아이의 숨겨진 삶이 드러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아이의 생부가 돌아오고 둘은 정당한 법적 관계를 회복한다.

아이의 ‘피의 힘’으로 해피엔딩으로 매듭짓지만 이 작품은 그리 녹록치 않다. 여기는 순결한 여성에 대한 강압적 육욕 추구라는 비인간적 범죄가 묻혀서 용인되고 있다. 개인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는 만행이 쉽게 용서되는 것이다.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득이한 사유의 원치 않는 임신이라도 낳을 수밖에 없다. 미혼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자신의 미래의 삶을 포기하는 당사자의 처참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작가는 모른척한다. 그것을 작위적 구성으로 우연한 계기로 당사자들을 조우시킴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레오까디아의 로돌포에 대한 태도는 클라이스트의 <O...후작부인>의 후작부인과는 대조적이다. 후작부인은 기절한 자신을 범한 F...백작의 끈질긴 구애와 용서 구걸에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권리마저도 상당히 빼앗은 후에 정식으로 청혼을 받아 당당히 결혼한다. 반면 레오까디아는 과연 로돌포를 사랑했을까 의문스럽다. 자신을 범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생부라는 사실만으로 급작스러운 애정이 샘솟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로돌포의 입맞춤을 허용하고 아주 쉽게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극적인 흥미로움에도 일각의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유리석사>의 소재는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다. 그 비일상성과 광기, 그리고 기이함은 바로 환상소설의 특징이 아니던가?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당대 사회를 풍자하고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또마스는 자신의 몸이 유리로 되어 있어 깨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한편 다년간의 공부와 여행을 통한 깨우친 지식이 광기와 결합하여 “모든 질문에 대해 기지와 정확성을 가지고 대답”(P.135)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또마스는 각계각층의 인물과 직업에 대해서 촌철살인의 평을 쏟아내는데, “훌륭한 화가들은 자연을 모방하지만 나쁜 화가들은 자연을 토해낸다”(P.145)거나 “놀라운 점은 이 세상에 속임수를 쓰는 재단사는 수없이 많지만 정직하게 옷을 만드는 사람을 이 업종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P.153)는 등 그가 언급한 인물군은 매춘부, 뚜쟁이 여인을 비롯하여 시인, 서적상, 포주, 가마꾼, 노새몰이꾼, 짐마차꾼, 선원, 마부, 의사는 물론 판사, 가짜 학사, 검사, 변호사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또마스의 목소리는 바로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다. 최전성기를 지나는 스페인 제국의 휘황한 위용은 사람들의 눈을 압도하여 사회에 내재한 자멸의 부조리를 외면하게 하지만, 영민한 세르반테스의 눈은 이미 사회가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 차있음을, 조만간 내재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임을 예감하였던 것이다.

제정신을 차린 유리석사에 대한 세인들의 무관심은 대중스타의 덧없는 인기를 연상시킨다. 대중은 겉보기 화려하고 멋있거나 특이한 존재에 열광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인기는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다. 그래서 유리석사는 스페인을 떠나 플랑드르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후안무치한 사기꾼들은 배불리 먹여 살리고 겸손한 인격자들은 굶겨 죽이는”(P.166) 당대 스페인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는 삶과 죽음이 한 발의 총탄에 좌우되는 엄연하고 진지한 현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집시 여인>은 뛰어나다. 제재와 구성, 그리고 전개가 훌륭할뿐더러 집시 세계에 대한 지적 흥미마저 충족시켜 준다. 집시의 원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인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는데, 확실한 건 오늘날도 살아남은 집시가 유럽 문화에 끼친 수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더불어 가장 비참한 대우와 편견에 피해본 집단이라는 점이다. 안드레스가 집시 사회의 일원으로 가입할 때 집시 노인이 장문(P.224~227)으로 들려주는 집시의 계율과 문화는 그들의 언뜻 이해 불가능한 삶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이 작품집에서 출생의 비밀은 일상적인 제재가 되어 사실 별다른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집시가 귀족 여자아기를 납치하여 집시로 키우다 이러저러한 사건의 경과 후 원래의 출생 신분을 되찾아 행복해진다. 비록 집시일망정 그런 여주인공은 사고와 몸가짐에 있어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우월한 면모를 보인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 또한 인종차별이 아닐는지.

사랑의 콩깍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혹자는 사랑의 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돈 후안은 쁘레시오사를 사랑하여 그녀의 요구에 따라 2년간 집시가 되기로 하고 자신의 신분과 집안을 버리고 출가하여 집시 안드레스가 된다. 일견 부잣집 도련님의 철없는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그의 솔직한 사랑과 대담한 실천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쁘레시오사에게 바쳐진 로만세와 시들, 그리고 끌레멘떼와 안드레스가 벌이는 한밤의 사랑의 노래의 경연이다. 이 시들은 쁘레시오사의 매력을 찬미하는 한편, 산문에 운문의 감흥을 배가하며, 더욱이 세레나데의 경연은 로맨틱한 정감을 극대화하여 이 부분만 떼어서 보면 목가적이기도 하다.

<집시 여인>과 유사한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작품이 <고상한 하녀>이다. ‘고상한’이라는 수식어는 당대의 관점에서 하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찬의 문구다. 하녀는 하녀일 뿐이다. 그런데 한 여관집 하녀는 그 미모와 독실한 신앙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소설 초반부는 피카레스크 풍이다. 까리아소는 악동적인 기질에 못 이겨 가출을 하여 스스로 고생을 자초한다. 그리고 악자로서 갖가지 체험을 한 후 고향에 돌아오나 참치 어장의 파란만장한 생활을 못 잊어 다시 친구와 길을 나선다. 세르반테스가 스페인 문학의 한 전통인 피카레스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훌륭히 계승하였음은 이 짤막한 소설뿐만 아니라 유명한 <돈키호테>가 이를 입증한다.

여관집에서 고상한 하녀 꼰스딴사에 마음을 뺏긴 아벤다뇨로 인해 두 사람은 각기 성명과 신분을 감추고 기꺼이 여관집 하인 행세를 한다. 여기서 작품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데 고상한 하녀에 대한 아벤다뇨의 사랑과, 다른 하녀들의 추근거림과 물장수 아스뚜리아노가 된 까리아소의 불운과 고난, 특히 “꼬리를 내놓아라”에 얽힌 일화는 웃음과 아울러 당대 서민사회의 단면을 직관하는 작가의 날카로우면서 따스한 시선을 볼 수 있다. 고상한 귀족사회는 그의 관심세계가 아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하인>은 주된 배경이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여기에는 영국과 스페인의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의 역사가 바탕에 깔려있다. 기사 끌로딸도의 인신 납치는 비록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결과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비열한 짓이다.

여왕의 곁에 있게 된 이사벨라와 결혼하기 위하여 리까레도는 영국 해적선을 이끌고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데, 흥미진진한 해전의 스토리는 작가 자신의 참전 경험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후에 생사가 불투명해진 리까레도의 극적인 귀환도 역시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수도사들이 성금을 모아 해방시킨 자전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즉 드물게 보는 작가의 삶의 경험이 작품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외적인 아름다움, 즉 미모를 상실한 이사벨라에 대하여 리까레도가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의 숭고함에 있다.

“그녀는 추한 괴물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없는 몰골로 사느니 차라리 독으로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P.334)

“이사벨라! 그대를 사랑한 순간부터 난 관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과 종말이 있는 그런 사랑과는 사뭇 다른 사랑을 느꼈다오. 그대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감정의 포로로 사로잡았고 그대의 끝없는 덕은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오. 한때 내가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추한 모습도 역시 사랑하오.” (P.336)

이러한 사랑이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찬란한 행복의 결실을 맺었음에 기뻐함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제시하는 사회와 인간상은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므로 부분적으로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적합하지 않고 긍정할 수 없는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귀족 사회의 공허함에 한눈팔지 않고, 사회의 실체인 서민과 하층 계급에 관심을 기울인 점,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미덕에 대한 옹호와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은 책장을 계속 넘기게끔 만드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결합하여 과연 스스로 <모범소설>이라 자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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