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이야기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물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민음사판 <세계의 환상소설>에 <잔혹한 이야기>의 일부 내용-‘진실보다 더 진실한’-이 수록되어 처음으로 릴아당[릴라당]을 알게 되었다. 매우 짧은 내용이라 제대로 된 면모를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인상과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후로 <잔혹한 이야기>를 한번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았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동안 장편소설로 생각했던 게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27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시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다양한 시기에 개별적으로 쓰여진 작품들을 작가는 한 권의 작품집으로 묶어놓고 그럴듯한 표제를 붙였다.

‘잔혹한 이야기’, 표제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유혈이 낭자하고 뼈와 살이 튀기는 처참한 B급 고어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서 그런 재미를 기대한다면 일치감치 책을 덮을 것을 권고한다.

공포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유혈장면도 더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지만, 일변하여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암시와 분위기만으로도 섬뜩함을 자아내는 게 보다 고단수의 솜씨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이 바로 그러하다.

몇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의도한 잔혹함은 육체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 면에서의 잔혹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도약기, 사람들은 배금주의와 물질주의의 마력에 점차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고전주의와 계몽주의 시기의 이성적 인간관, 고상한 미덕을 갖춘 바람직한 인간형에 대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돈과 부가 가치관의 주류로 부각한다.

저자는 당대야말로 잔혹한 시대임을 인지하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비정상적인 잔혹한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정신과 영혼이 타락하고 비정상인 경우보다 더 잔혹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전체 수록작품들이 모두 생경한 인상을 남기며, 깊은 여운을 드리워 새삼 곱씹을 만하다. 숨어있는 명작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몇 작품의 인상을 기록한다.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에서 언니 앙리에트와 동생 올랭프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몸을 판다. 고결하고 숭고한 동기는 그들을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올랭프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의무에 태만하고 망각하기조차 한다. 둘 중에서 누가 타락한 아가씨인가? 작가는 앙리에트의 당당함과 올랭프의 수치심을 극적으로 대조하여 전복된 가치관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랭프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여자아이(P.19)일 뿐이다.

우주와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는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유물론적 관점이 지배적인 오늘날, 물질이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관념의 고도 집약이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서 떠도는 먼지들이 강력한 중력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뭉치듯이 말이다. 관념만으로 존재가 형성되는 현상을 그린 작품이 <베라>이다. 아톨 백작의 지극한 아내 사랑은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P.36)
되살아난 베라는 아톨 백작의 관념이 만들어낸 실체이다. 그러기에 관념이 흔들리면 실체의 존재마저도 흔들리게 된다. 백작이 문득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베라의 실체는 사그라진다, 돌이킬 수 없이.
“그는 고작 한마디 말로 자기를 지니고 있는 눈부신 생명의 실을 끊어버린 것이다.”(P.37)

<복스 포풀리>는 샹젤리제에서 시대에 따라 반복하여 거행되는 웅장한 열병식 장면과 불쌍한 거지의 외침을 통해 진정한 민중의 소리-염원과 바램-가 무엇인지를 냉소적으로 웅변한다. 정권이 바뀌고 지배층이 변경되어 군중은 환호하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지만 그들의 삶은 변함없다.
반복되어 외치는 거치의 구걸 소리-“제발 이 불쌍한 장님에게 동정을 베푸십시오.”. 그것은 진실의 소리(P.43)이자 야경꾼의 목소리(P.44)이며 청렴한 보초병의 목소리(P.44)이다.

<두 사람의 점술사>는 한 신문사 편집주간과 예비 저널리스트 간의 대화를 통해 당대 부르조아 사회,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편집주간의 말은 아프기 이를 데 없다.
“우린 절대로 아무도 출간 안 할 거라고 확신한 원고만 읽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원고들만 인쇄하지.”(P.51)
여기는 당대 부르조아 독자층의 지적 수준과 선호도에 대한 작가의 경멸스러운 냉소가 깊게 어려 있다. 편집주간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바로 “영혼”(P.57)이라고 지적하며, 예비 저널리스트에게 문필가의 진정한 좌우명은 “범인(凡人)이 되시오!”(P.58)라고 설파한다.

<하늘의 선전물>은 우울한 과학기술적 배경을 취하고 있다. <영광 제조기>, <마지막 숨의 분석기>, <트리스탕 박사의 치료> 등이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기술의 가면으로 위장한 부르조아의 천민자본주의와 배금 만능주의에 대한 얼치기 예찬 형식을 빌린 실체 고발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비생산적이었던 하늘을 활용하여 실리와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예찬을 나열한다. 그리고 가져올 엄청난 광고효과와 막대한 실질적 가치를 예시한다. 작가가 말한 하늘은 오늘날 사이버공간으로 훌륭하게 대체 구현되어 있다.

<영광 제조기>는 엄밀히 말해 극장에서의 영광에 국한하며, 박수꾼을 기계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정신’은 바로 기계에 있는 거랍니다.”(P.91)
“정신적 대상에 도달하는 물질적 수단, 즉 성공은 현실이 되는 것이죠.”(P.91)
당대 연극계에 만연한 부조리에 대한 일침을 통해 작가는 관객과 박수꾼 부대, 훼방꾼, 평론가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박수꾼은 물론 평론기사도 기계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오늘날 대중예술계에서 박수부대의 적극적 활용과 노이즈 마케팅 등은 비록 기계화되어 있지 않을 뿐 릴아당의 지적한 바를 여전히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작품을 통해 릴아당은 당대 부르조아 사회와 시민을 풍자 및 조소하고 그들의 상업성, 태금주의, 위선적 교양과 도덕 등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비르지니와 폴>은 유명한 <폴과 비르지니>를 뒤집어놓는다. 더 이상 순결하고 무구한 폴과 비르지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듬뿍 버는 것에 기뻐하며, 하잘 것 없는 선물대신 저금통을 듬뿍 채워주길 바라며, 시골생활이 경비를 절감해 줄 것을 기대한다. 릴아당의 시대는 그들마저 세속주의에 물들게 한다.

<마지막 만찬의 손님>은 사튀른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과 점증하는 이상함이 작품을 주도한다. 반전으로 드러나는 정체와 충격.
“확실히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는 그 완벽성에 미친 사람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요.”(P.144)

<혼동하는 만큼!>은 앞서 언급한 <진실보다 더 진실한>과 같은 작품이다. 시체공시소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식거래인들이 모여 있는 카페의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면서 작중인물은 “두 번째로 본 광경이 첫 번째보다 한층 더 불길한 징조”(P.156)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감상주의>는 감각에 대한 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점을 시인 자신의 입을 빌어 열정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바다로 다가가면서 듣게 되는 큰 파도 부서지는 소리처럼 점점 커지는 것이지요. 오묘한 감각의 연장을 인식하는 것, 그 무한하고 신비로운 울림을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 예술가 혈통의 우월성을 결정짓지요.”(P.182)
그것은 또한 시인 막시밀리앵의 실연에 따른 죽음에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사후에 은은한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찬>은 한편의 우화이다. 라이벌 페르스노아 씨와 르카스텔리에 씨 는 가장 멋진 만찬 대결을 벌인다. 르카스텔리에 씨의 만찬은 외관상 일 년 전 페르스노아 씨의 만찬과 완벽히 동일하다.
“똑같은 만찬이었지요?”
“네, 똑같았어요.”
그리고는 한숨 한 번과 침묵, 그리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떨떠름한 우거지상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정말로 똑같았지요?”
“그러나 무언가 다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다른 무언가가 있었어요.”
“결국...그래요, 올해 쪽이 더 좋았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묘하네요. 똑같았습니다...만, 그러나 훨씬 멋졌습니다!”(P.199~200)

전년과 올해 만찬의 차이는 단 한가지였다. 각자의 접시 위에 하나씩 놓인 이십 프랑짜리 금화 한 닢(P.197)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극배우 쇼드빌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연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망령을 보고 회한을 통해 진짜 인간다운 감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는 방화를 저지르고 이 흉악한 범죄로 수많은 인명이 불에 타죽는다. 그는 외딴 등대로 몸을 피하고 망령이 찾아와 자신이 회한에 떨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엇 하나 전혀 느끼지를 못했다...”(P.216). 절망과 고독에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그는 망령을 보길 간구하면서 죽어갔다. “그 자신이야말로 그가 찾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P.217) 깨닫지 못한 채로.

<마지막 숨의 분석기>는 죽음 앞에서 탄식과 눈물은 사회 차원의 시간낭비(P.228)이므로, 이 분석기가 상주들이 망자 앞에서 견식있고, 동정심 있고, 호감이 가고, 격식에 맞게 무관심(P.226)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잊혀지게 마련이니, 즉석에서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P.228)

<노상강도>는 막연한 공포가 집단 발작을 일으켜 자멸의 길로 빠져드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팽팽한 공포와 긴장 상황에서 사소한 계기가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구실을 하게 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새삼 절감하게 한다.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사실이 허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본래 허구가 사실로 둔갑되었다가 다시 허구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D씨의 ‘사실’ 이야기는 듣는 이를 모두 매료시킨다. 후에 ‘나’가 들은 대로 친구에게 전달하였다.
친구의 반응은? “으음, 완전히 소설이네요!...그걸 글로 쓰지 그래요!”
‘나’의 대답은? “예. 이제 이걸 쓸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완성됐으니까요.”(P.265)

‘이제’라는 시점을 통해 작가는 허구화가 완성되었음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펠리시엥은 극장에서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쫓아가 구애를 하지만 의외로 그녀의 대답은 차갑다.
“몇 년 전부터 제게는 언제나 똑같은 대화였답니다. 이런 역할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해진 대사를 해야 하는 역할이에요.”(P.304)

그녀는 자신이 귀머거리임을 밝히며, 일반 여성들을 정신적 귀머거리(P.308)로 혹평한다. “말의 표면상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 속에 숨겨진 것을 나타내는 심오한 말의 본질, 즉 진정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상대가 아첨을 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P.307)

그녀는 사랑의 맹목성과 결혼 생활이 오히려 잔혹한 순간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총총히 떠난다. 이것이 <미지의 여인>이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잔혹성을 현실의 부조리를 먹고 크는 환상의 아들로 지칭한다. 현실이 상식성에서 일탈하여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울 때 현실은 잔혹성을 띤다. 일상성을 떠난 현실,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환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동전의 양면관계이다. 환상이 꿈과 몽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일상에 근접하고 현실에 가까운 기반을 두면서도 우리에게 생경한 연유는 바로 이러한 의외적 편재성이 주는 당혹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록작품>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
베라
복스 포풀리
두 사람의 점술사
하늘의 선전물
앙토니
영광 제조기
포틀랜드 공작
비르지니와 폴
마지막 만찬의 손님
혼동하는 만큼!
군중의 성마름
옛 음악의 비밀
감상주의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찬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
어둠의 꽃들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
노상강도
이자보 여왕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
전조
미지의 여인
마리엘
트리스탕 박사의 치료
사랑 이야기
오묘한 회상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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