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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재판관
박철 지음 / 연극과인간 / 2005년 10월
평점 :
<돈키호테>1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마지막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범소설>등에 이어 <돈키호테>2편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을 1615년에 발표한다.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은 세르반테스가 꾸준히 써왔던 극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으로 연극 장르에 대한 작가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막간극’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막간극은 귀족들의 연회 도중 휴식시간에 상연하거나 긴 연극의 막 사이에 분위기 전환용으로 상연하는 짧은 극작품을 가리킨다. 어떻게 보면 장편 연극에 대응되는 단편 연극이라고 하겠다.
8편의 막간극은 다음과 같다.
– 이혼 재판관
–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
–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
– 성가신 감시
– 가짜 비스까야 사람
– 기적의 인형극
– 살라망까 동굴
– 질투심 많은 늙은이
각각의 작품은 짧은 분량에도 온전한 개성을 드러내며 성격이 명확하다. 더욱이 돈키호테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고상하고 젠체하는 귀족과 왕정에서 멀리 떠나 범인(凡人)과 속인(俗人)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가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허점투성이다. 따라서 조소와 해학을 아끼지 않지만 그가 보는 시선을 결코 차갑지 않다. 그는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에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악인도 악인답지 않으며, 인간은 선과 악이, 그리고 고결과 비속이 혼재된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게 된다.
<이혼 재판관>에는 이혼 허가를 요청하는 네 쌍이 등장한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성적인 욕구 불만, 남편의 생활 무능력, 상호간의 증오, 창녀와 술김에 결혼한 인부의 아내의 나쁜 성격과 행실 등 그 사유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재판관은 “이런 이유가 이혼 사유가 된다면 끝없는 이유를 대며, 결혼의 속박에서 지을 털어놓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소?”(P.15)하며 이들을 만류한다. 반면 서기는 “그렇게 되었다가는 여기 이 법정의 서기들과 검사들은 굶어죽게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혼신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P.17)라는 입장이다.
결론은? “제 아무리 나쁜 부부라도 가장 좋은 이혼보다는 낫다.”(P.18)는 악사의 노랫말.
과연 그럴까? 가장 좋은 부부를 능가하는 것은 없겠지만, 때로는 가장 좋은 이혼이 인간관계의 파탄을 막아줄 수도 있는 법.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는 창녀와 기둥서방이 등장한다. 당대는 몸을 파는 직업에 대하여 커다란 거부감을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겸손한 순응이랄까. 뜨람빠고스는 자신의 창녀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있다. 뜨람빠고스와 다른 뚜쟁이 치끼스나께 간의 대화는 그야말로 진지한 해학의 참면모를 보여준다. 뜨람빠고스가 진정으로 뻬리고스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천만에, 단지 그는 수입원이 사라진 게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녀를 고른 후 파티를 벌인다. 이때 레뿔리다의 애인이었던 건달 에스까라만이 증장하여 한바탕 걸쭉한 춤과 노래로 막을 내린다.
대체 이게 뭐냐고? 막간극에서 뭔가 진지한 것을 기대하지 말자. 막간극의 용도가 무엇인지 벌써 잊었는가?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는 시장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자를 학사와 서기, 시의원이 면접시험 하는 희화화하고 있다. 두 시의원 빤두로와 알론소의 말꼬리 잡는 험담은 그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후보자들도 만만치 않다. 암송만 잘하는 이, 뛰어난 포도주 맛 감별력, 새총 맞추기에 탁월한 솜씨 등.
분위기는 뻬드로 데 라나의 진지하며 성실한 시장 직무관 피력으로 사뭇 엄숙해지지만 곧 등장한 집시들의 가무로 흐트러진다. 지켜보던 성당지기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지자 바로 치도곤을 당하고 쫓겨난다.
“정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걸세.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P.58)
복합적 결말이다. 막간극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종교의 정치 간섭에 대한 거부감, 어리석은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소박한 정치에 대한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성가신 감시>는 군인이 자신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인의 집 밖을 지키고 서서는 경쟁자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는 내용이다. 구두상인과의 얼토당토 않는 흥정이 웃음을 선사한다. 결국 하녀는 집주인 앞에서 군인 대신 성당지기를 선택하고, 투덜과 자축의 말로 극이 끝난다.
<가짜 비스까야 사람>은 두 젊은이가 자칭 영특하다고 하는 세비야 출신의 매춘부를 놀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유는 묻지 말자. 막간극에서 그런 질문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가짜 비스까야 사람으로 위장하고 끄리스띠나에게 값비싼 목걸이를 담보로 맡겨 공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한 다음, 목걸이가 가짜로 바뀌었다며 소동을 벌인다. 매춘부 여인은 당당하게 시장 앞으로 나가 진실을 주장할 수 없다. 직업적 연유로 시장이 그녀를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 판국이다. 결말은 놀림이었음을 밝히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해피엔딩! 만약 놀림이 아니고 진짜 발생한 일이라면 끄리스띠나의 앞날은 샛노랗게 변했을 터인데 장난이 죄없다고 누가 주장하는가?
<기적의 인형극>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과 유사한 제재를 다룬다. 아무것도 상연되지 않는 인형극 무대, 하지만 관객들은 기적이 보이는 양 연출가의 대사에 맞장구치기 급급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거나, 합법적인 결혼을 한 부모에게서 임신되고 출생되지 않은 사생아들”(P.110)로 비난받을까 두려워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니 그야말로 ‘기적의 인형극’이 아닌가?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아무 사정도 모르는 기병대 장교를 저주받은 창녀의 아들이나 천박한 유태인으로 마음껏 희롱한다. 바보들의 행진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치들 중 하나가 틀림없소!...개종한 유태인이나 사생아 같은 자들은 용감하지 못하지! 따라서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요. 그들 중 하나야.” (P.123)
또 하나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바로 <살라망까 동굴>이다. 첫 장면은 애틋하지 그지없다. 나흘간 집을 비우는 남편의 부재를 눈물로 슬퍼하며 기절까지 하는 아내, 진정한 부부애의 전형이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여자의 반응은?
“꺼져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사라져버리고 마는 연기처럼!” (P.128)
아내는 정부(情夫)를 불러 즐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하녀와 더불어 몸이 달아있다.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가난한 살라망까 출신의 대학생의 등장. 남편의 갑작스런 귀가는 이들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고 대학생은 살라망까 동굴에서 터득한,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불러오는 기술을 능청스러운 연기한다. 졸지에 악마가 돼 버린 두 명의 정부(情夫)! 순진한 남편은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한다.
인간 악마와 남편 빤끄라시오 간의 대화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악마가 식사를 하며, 노래도 부르며, 유명한 춤도 잘 춘다는 사실에 남편은 놀란다. 악마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친근한 동네 이웃과도 같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나이어린 여성과 결혼하여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늙은이와 이를 속여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젊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늙은이는 일체 외출을 금하고 문과 창문에 자물쇠와 철책을 설치하며, 이웃조차도 대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한다. 그에게 도냐 로렌사는 늘그막의 “여생의 동반자이자 선물”(P.151)에 불과하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억누를 수 없는 법, 그래서 도냐 로렌사와 하녀는 이웃인 오르띠고사와 짜고서 한 사내를 몰래 집안으로 들이고 굶주린 아내는 회포를 푼다. 그림 속의 사내와 현실의 사내. 남편을 속이기 위한 아내와 하녀, 오르띠고사 간의 절묘한 화음은 부조화 속의 조화를 연상시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유명한 4중창 장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세르반테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짤막한 단편극에 진지하고 심오한 사족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부조리, 결혼제도의 모순과 불평등, 억압당하는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지위 등 이것저것 주워오면 꽤나 그럴듯하다.
세르반테스는 요컨대 외형적 가면과 속박을 벗어난 소위 생얼의 인간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쑥스러움과 재미를 동시에 관객에게 안겨준다. 물론 비평가들의 현학성도 충족시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