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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꿈입니다
뻬드로 깔데론 데 라 바르까 지음 / 서쪽나라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칼데론은 스페인 바로크문학의 최후 대가이면서, 로페 데 베가와 함께 황금세기 문학시대 희곡 부문의 양대 거장이다. 100여 편 이상의 다작가인 그의 작품 중 다행스럽게도 국내에는 두 권의 번역본이 나온 바 있다.
<인생은 꿈>, 그럴 듯한 표제다. 어찌 보면 인생무상 또는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혹 동양적 가치관과의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표제만 그러할 뿐, 순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으로 보면 장자 보다는 전개에 있어 남가일몽(南柯一夢)과 유사하다.
현실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기독교에서는 현실 세계는 한갓 스쳐지나가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덧없는 꿈에서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을 누려본 들 그것이 사후 영원한 세상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다. 오히려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는 인성을 수양하지 않고 타인을 억압하는 불의를 저지르면 영원의 세계에서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각자는 현실의 자기 본분에 안주하고 신께 감사하는 생활태도를 견지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은 꿈’의 기본 논리다. 이것은 사실 모든 권력자들의 종교에 대한 바램이기도 하다.
칼데론은 이 작품에서 위 사고와 운명 예정설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우위를 결합시켜 극을 전개해 나간다. 고대 및 중세의 문학에서 오이디푸스 등의 인물이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기 위하여 행한 모든 행동은 무위로 그치고 결국 운명은 실현된다. 그런데 칼데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고 이로 인하여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란 단어는 작품 곳곳에 등장하여 작가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난,
더 많은 자유의지를 갖고도
자유는 적단 말인가? (P.24)
하지만 이 작품을 지배하는 기본 정신은 역시 ‘인생은 꿈’의 사상이다. 감금된 왕자 세히스문도는 감금된 삶과 잠시 맛본 화려한 왕자로서의 삶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인지 혼란스럽다. 자신이 왕자가 되어 권력을 쥐게 된 것을 안 순간, 그는 억압으로부터의 분노를 거칠게 표출한다. 하지만 재차 감금되어 왕자의 삶이 꿈이 되어버리자 그 후 다시 군인들에 의해 풀려나고 나서도 혹시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움이 그의 행동과 태도를 조종한다.
“끌로딸도,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P.74)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네가 자라난 곳으로 넌 돌아 갈 것이다.
네게 일어난 모든 일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다 그러하듯 꿈을 꾼 것이니.” (P.102)
그래서 세히스문도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데, 기실 이는 작가가 작품에서 독자에게 말해주고 싶은 요지이다.
“산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꾸고 있다는
그토록 분명한 세상에 있으니.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깨어날 때까지
현재의 자기를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P.123)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열정.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환상이자
그림자이며 허상이다.
그리고 최대의 선도 부족하다.
모든 인생이 꿈이며
꿈은 단지 꿈일 따름이다.” (P.124)
“내가 잠에 든 것이라면 나를 깨우지 말고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를 자게 하지 마라.
그러나 현실이든 꿈이든
중요한 것은 잘 행동하는 것이다.” (P.135)
이 극의 아름다움은 도덕적 교훈에 있지 않다. 작가가 주창하는 자유의지 사상도 아니다. 작가는 인물 간 대립의 긴장- 끌로딸도와 로사우라, 세히스문도와 왕 바실리오-의 미학을 잘 살리고 있다. 여기에는 인위적으로 숨겨왔던 그러나 영원히 감출 수 없는 천생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로사우라와 아스똘포, 에스뜨레야와 아스똘포 간에는 남녀 간의 사랑의 진정성과 배신이 얽혀있어 또다른 흥미를 준다.
이 극은 산문 희곡이 아니다. 작가는 운문의 형식에 바로크 시대의 양식에 맞는 매우 화려하며 장식적인 표현기법을 다채롭게 활용하고 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게 수사적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당대에는 그것이 일상적인 표현기법이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숲과 들 사이로 흐르는 냇물의 정경을 묘사한 한 대목을 여기에 적는다.
“꽃 사이로 풀려 나온
구렁이인 시냇물도 태어난다.
은으로 된 뱀이
꽃 사이로 미끄러져 다니며
자기의 속삭임으로
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꽃들은 그가 도망가도록
광활한 들판을 활짝 열어 놔준다.” (P.25)
이러한 유의 작품은 원어의 낭독을 통해서만 작가가 추구하는 운율과 음악적 요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독자에게 주는 즐거움과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