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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노인 ㅣ 열림원 이삭줍기 9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열림원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슈티프터의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보헤미아의 숲>보다는 <숲 속의 오솔길>과 성향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서두부터 압도적인 자연 풍광이 묘사되지 않고,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소소한 일상사가 전개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두드러지게 하는 점은 대조의 미학이다. 여러 요소 간의 대비와 긴장이 주는 팽팽함은 작품 중반 이후를 끌고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작품 표제는 ‘외로운 노인’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빅토르라는 약관 남짓한 청년이며, 빅토르의 싱싱한 생명력이 전체를 휘감는 가운데 ‘외로운 노인’인 백부의 쇠잔함과 극적인 대비 효과를 보인다.
또한 빅토르는 비록 고아이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의 따뜻한 우애와 보살핌을 받으며 건전한 인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백부는 스스로 산중 호수의 섬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외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며 하인들도 믿지 않고 출입구를 비밀로 한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빅토르의 집과 백부의 것은 어떠한가. 둘 다 자연 속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에 불과하다. 빅토르 집은 인간을 오붓하게 감싸 안고 포근함을 제공하는 숲과 빛나는 햇살로 가득한 양지인 반면, 백부의 호수 집은 접근조차 어려운 깊은 산속 오지이며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산준령으로 가로막혀 있어 햇볕조차도 슬그머니 비껴가는 음지이다.
빅토르가 명에 따라 도보 배낭여행을 하면서 백부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슈티프터의 장기가 발휘된다. 즉 탁월한 회화적 자연묘사이다. 알프스 호반의 정경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주인공이 맞닥뜨리고 극복해야 할 시련의 험난함과 깊이를 암시한다. 그리고 섬에서의 하릴없는 산책과 수영을 통해 풍경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각성을 하게 되는 주인공과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조카를 성숙하고 대담한 청년으로 키우고자 하는 백부를 통해 작품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
백부가 빅토르에게 요구했던 도보여행은 조카가 안온한 품에서 뛰쳐나와 세상에 당당하게 두발로 서기를 원했던 의도였으며 빅토르는 이를 훌륭히 실현하였다.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크고 넓어졌고, 경관은 더욱더 화려해졌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온갖 만물들이 그를 환영해주었다.” (P.59)
빅토르와 한나의 결합은 암시된 예정이었다. 한나의 갑작스러운 키스, 한나를 빼닮은 루트밀라의 초상화, 그리고 귀향한 빅토르와 한나의 어색한 인사 등.
슈티프터의 글은 읽고 나면 기분이 흐뭇하고 평온해진다. 시대와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아름다운 감성을 충족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 2011. 2. 12 마이페이퍼에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