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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숲. 숲 속의 오솔길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34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슈티프터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상념은 그의 작품 속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그를 가리켜 ‘보헤미아 숲의 작가’라고 부르는 것에 매우 공감한다.
<보헤미아의 숲>의 서두에 수 쪽에 걸쳐 묘사된 보헤미아의 숲, 뵈머발츠의 장관은 대자연과 숲의 문학적 형상화의 일품이다. 초기에 유장한 흐름으로 전개되던 작품은 후반부에 이르러 급박한 변화를 거쳐 쓸쓸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숲 속을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연상시키며.
클라리사와 로날드의 엇갈린 사랑의 결말은 작품 중후반을 이끄는 원동력이지만, 작품 전체를 휘감지는 못한다. 그들의 애사(哀史)는 잠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지만 호수는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그들의 비애는 나무 사이로 바람이 되어 흩날리지만 숲은 바람을 가두어두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생성되고 활동하다가 소멸되는 것처럼. 자연은 인간사를 포용한다.
“거대한 숲은 서쪽으로 길게 드러누워 조용히 원시림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레고르는 숲 속의 집을 불태워버리고 그곳에 씨를 뿌렸다. 씨앗들은 단풍나무, 떡갈나무, 소나무 등 숲 속 초원에 있던 갖가지 묘목으로 자랐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들은 곧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다시 옛날처럼 울창한 원시림으로 돌아간 숲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P.134)
이 작품은 슈티프터의 숲의 찬가이다. 서두의 장대한 묘사를 제외하고도 곳곳에 아침이슬 같은 아름다움이 반짝인다. 자연의 아름다운 평온과 인간의 탐욕스러운 전쟁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힘이 생기면 심술궂고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숲은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고요한 숲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장엄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설픈 선입견으로 숲을 바라보곤 하죠.” (P.74)
“저 바깥 세상에도 전쟁의 소용돌이와 파괴가 사라져 이곳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비쳤으면 좋겠소. 화려하게 번쩍이는 암벽, 간간이 떨어지는 저 단풍잎을 보시오. 귀뚜라미는 울고, 부드러운 미풍은 여린 거미줄 하나 건드리지 않는군요. 가늘게 떨리는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잿빛 바위 위에 살며시 내려앉아 있소...” (P.103)
<숲 속의 오솔길>은 표제만 보면 <보헤미아의 숲>의 한 장으로 받아들이기 딱 좋다. 하지만 조금 더 훈훈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보다 읽는 재미가 많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자연은 인간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성숙시킨다. 속세에 물들어 바보가 되어버린 티부리우스를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킨 것은 온천장의 숲이다. 티부리우스는 숲 속의 산책과 도중에 만나게 된 시골 아가씨 마리아와의 깨끗한 만남을 통해 내면적 충일에 도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온천장의 숲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해피엔딩적 연애 이야기로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있겠지만, 슈티프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남녀 간 연애와 결혼의 소재가 아닐 것이다. 그는 숲이 가지는 올바른 치유력, 도시에서라면 일탈로 흐르기 쉬웠을 남녀간 숲 속 데이트를 티없이 맑게 이끌고 가는 정서적 순결함을 속세의 우리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언뜻 보면 비현실적일정도로 기이한 티부리우스의 삶의 모습도 후반부의 평범한 일상적 삶의 기쁨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은은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얻고자 하면 매우 추천할 만하다.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아취를 느낄 수 있다.
- 2011. 2. 10 마이페이퍼에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