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료된 여행자
레스코프 지음, 김진욱 옮김 / 생각하는백성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레스코프의 1873년 작인데, 작품명의 번역이 애매하다. 매료된 여행자, 신들린 순례자, 마법에 걸린 순례자, 매혹당한 나그네 등등. 영어판 표제와 작품 내용을 감안하면 그냥 ‘매료된 여행자’가 무난한 듯.
이반 푸랴긴이라는 농노의 자식의 일생에 걸친 방랑담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읽어본 레스코프 작품의 구성상의 특징은 등장인물 본인 또는 화자의 입을 통해서 인물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쭉 나열하는 것이며, 여기서도 이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일찍이 채집한 러시안 민중의 각종 이야기들을 자신의 작품에 적절히 녹여서 표현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이야기 방식(스카즈, 설화체)이 가장 적합하다고 레스코프는 판단한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레스코프 문학의 특징인 스토리와 재미, 민중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주류 문학계에서 소외되었던 사유도 일면 이해된다. 그에게는 얼핏 동시대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가적 치열함이 결여되어 있다.
이반 푸랴긴이란 인물은 아버지를 따라 보조 마부로 지내다가 애완고양이를 죽인 일로 처벌을 받게 되자 자유를 찾아 떠난다. 그는 관리의 보모 역할을 하다가 달탄인(타타르인)과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겨우 탈출하여 뛰어난 말(馬) 감식안을 바탕으로 어느 귀족의 말 감정인으로 지내다가 연모하던 집시여인이 귀족에게 버림받자 자살하는 것을 도와주고 가명으로 군대에 들어가 장교까지 되지만, 결국 어릴 적 예언대로 수도원에 들어가 각지를 떠도는 수도사가 되어 여행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반의 삶은 당대 러시아 하층민의 일상적 삶의 양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이를 통해 당시의 민중 습속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드넓은 스케일로 이반의 방랑을 그리고 있어 흥미롭기 그지없다.
여기서 이반의 일생은 일관된 체계와 방향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레스코프가 풀어놓고 싶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맺어주는 연결핀의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반의 이야기를 듣는 다른 여행객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넋을 잃고 그가 털어놓는 자신의 체험담을 흥미진진하게 듣기만 하면 된다.
레스코프는 현재와 미래시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를 얻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20세기 이후 상류층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으며, 보다 난해하고 대중 유리적인 문학경향에 대한 잠재된 반발로 서사성과 흥미성의 결합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레스코프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이다.
이 책은 영문판을 중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편집이 깔끔하지 못하고 오자가 제법 많아서 추천하기는 좀 그렇다. 하루빨리 당당한 원전 번역이 나오길 기대한다.
- 2011. 1. 18 마이페이퍼에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