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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아 이야기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8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지음, 정서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원제는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이며, 국내에서 ‘방랑아 이야기’, ‘어느 건달의 생활’, ‘명랑한 방랑아’, ‘어느 무위도식자의 삶에서’ 등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다양한 표제로 번역되는 것은 타우게니히츠(Taugenichts)의 미묘한 의미에 기인한다.
타우게니히츠는 본래 건달, 쓸모없는 놈, 무위도식자 등의 의미로 사실은 매우 부정적인 지칭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헨도르프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이를 뒤집어 긍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원제 그대로 번역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살리지 못한다고 하여 일부 번역본에서는 ‘방랑아’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작품 내용상으로 볼 때는 이편이 보다 근사치에 가깝기도 하다.
이쯤에서 딱딱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작품 자체로 뛰어들자. 그러면 독자는 이 경장편 소설에서 신선하고 파릇파릇하며 아침이슬처럼 반짝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다. 문학작품을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는 한계가 절실하지만, 어차피 나는 비평가도 아니므로 현학적 표현을 쓸 능력도 이유도 없다.
주인공이자 타우게니히츠인 화자는 넓은 세상에 나가 행운을 잡아보기 위하여(P.14) 이른 봄 집을 나선다. 아버지의 호통은 단순한 계기일 뿐 화자의 심중에 내재한 자연스런 충동의 발로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연의 여정과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연모의 정, 이탈리아로의 모험 등 동화의 장면들이 잇달아 전개된다. 그렇다, 이 작품은 청년과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청년에게는 꽃다운 청춘 시절, 물질적인 현실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세상을 향해 커다란 걸음을 옮기라는 방랑의 부추김을 알리는 동화이다. 어른에게는 잃어버린 청춘 시절을 가슴 저미게 회상하며, 현실에 추락하지 말고 가슴 한켠에 여전히 자연과 환상을 품고 살라는 요청의 동화이다.
이 작품을 동화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많은 비판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건달과 방랑생활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을 하게 되는 부적절한 결말 도출, 소박한 실생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반사회적 메시지, 더 나아가 당대 독일 사회의 정치적 침체상황에서 생성된 시대착오적인 목가적 비더마이어 경향의 예찬 등.
현실은 냉혹하더라도 따뜻한 가슴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과 같은 소박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감명받고, 오래오래 되새긴다. 아이헨도르프의 이 작품은 상기 작품들의 확장판이며, 독자에게 주는 기본 정서는 동질적이다. 이 작품이 당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독일 내외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부담 없는 분량에 수록된, 소박하면서 한없이 아름다운 자연예찬, 성과 정원의 귀족적 우미함, 화자의 솔직하고 명랑한 성격과 행동 및 깊은 신앙심, 화자의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순수하며 열정적인 사랑, 화자의 항로를 기로에서 절묘하게 구해주는 우연한 행운, 그리고 화자와 아름다운 아가씨의 행복한 결합으로 이어지는 결말, 그리고 방랑아이자 예술가로서 화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 그리고 음악 연주 등. 이 작품을 빛내주는 요소들의 목록은 이처럼 길게 늘어난다.
화자 타우게니히츠는 건달이고 방랑아이지만, 그는 건전하고 명랑하며 순수하다. 이것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경묘하게 만들어 책을 읽는 독자의 심경도 자연스레 화사하게 만든다. 긍정적 타우게니히츠의 예찬, 이것은 점차 자본주의화, 산업화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작지만 힘찬 반론 제기다.
덧붙여 화자의 샘솟는 방랑정신은 오늘날 현대적 유목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하고 나는 외쳤다. “영원히, 하늘이 푸른 곳이면 어디까지든!” (P.45)
“방랑아보다 멋진 사람이 누굴까? 우리들은 낯선 곳을 방황하면서 항상 새로운 세계를 호흡하는 것이다.” (P.52)
““자, 모두들 잘 있거라!”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마차가 날 어디로 데려다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P.79)
※ 아이헨도르프는 서정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많은 시편들이 당대와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독일가곡으로 작곡되기도 하였다.
<달 밤>
그건 마치 하늘이
대지에 조용히 입 맞춘 것 같았다.
꽃에 달빛이 비치는 지금
대지는 그 하늘을 꿈꾸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바람이 들판에 불어오고,
이삭들이 가볍게 움직인다.
숲에서는 나직이 소리가 나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내 영혼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저 멀리
조용한 대지 위를 날아간다.
마치 집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밤의 꽃>
밤은 고요한 바다와 같다.
기쁨과 슬픔과 사랑의 고뇌가
얼기설기 뒤엉켜 느릿느릿하게
물결을 몰아치고 있다.
온갖 희망은 구름과 같이
고요히 하늘을 흘러가는데
그것이 회상인지 또는 꿈인지
여린 바람 속에서 그 누가 알랴.
별들을 향하여 하소연하고 싶다.
가슴과 입을 막아버려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희미하게
잔잔한 물결소리가 남아 있다.
- 2011. 1. 6 마이페이퍼에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