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이삭줍기 3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페터 슐레밀'은 서양문학에서 꽤 유명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작가 샤미소가 만들어낸 페터 슐레밀이라는 작중인물의 성격이 개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데 연유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개설서에는 제약 조건 상 비록 그의 작품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서문에서 선구적인 그의 면모를 외면하지 않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그림자를 악마에게 팔아넘긴 인물을 그린 환상소설이기에 이름이 나게 된 것이 아니다. 중편에 해당하는 적은 분량이지만 여기서 독자는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나름 진지한 모색을 하게 된다.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어떠한 가치를 지닐 것인가? 존재도 희박하고 값어치도 거의 없어 보이는 그림자, 그것을 무한한 금전과 교환한다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것은 19세기의 슐레밀 뿐만 아니라 항상 금전적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도 공통적이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아넘길 따름이지만 알게 모르게 제법 많은 이들이 자신의 육체적인 장기를 갈취당하고 있다. 전혀 우습지 않은 우스개소리지만 신체포기각서를 쓰기도 한다.

전에는 그림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이 거부가 된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알고 외면하며 손가락질한다. 그는 사람이되 올바른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사실상 그는 악마와 같은 부류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넘기고 젊음을 되찾지만, 슐레밀은 그래도 영혼을 넘기지는 않는다. 그림자는 제2의 자아를 상징할 때, 그림자를 넘겼다면 다음 수순은 영혼도 파는 것일 텐데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합을 눈물을 흘리며 포기하면서 슐레밀은 악마와의 추가적 거래를 거부한다. 이것이 슐레밀과 파우스트와의 차이점이며, 슐레밀이 결국 마술장화를 얻게 된 계기가 된다.

사랑과 세상과, 그림자의 댓가인 ‘행운의 자루’를 포기한 그는 이제 마술장화를 신고 속세를 떠나 은둔자의 삶을 누린다. 인간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고독한 삶 속에서 슐레밀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내심이 결코 편안하지 못함은 북극곰에 놀라 남북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정신을 잃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병원에서 요양하면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생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슐레밀은 자본주의 속 우리들 자신의 선구적 자아상이다. 누구도 금전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누구는 존 씨처럼 영혼을 넘기지만, 대다수는 슐레밀처럼 갈등을 겪으며 악마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 작가 샤미소는 독특한 인물이다. 식물학자이기도 한 그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는 시집도 발표하였는데, 남자이면서도 여자 특유의 내밀한 심적 상태와 삶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작곡가 슈만이 8개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한 동명의 리트로서 더욱 유명하다.  

- 2011. 1. 4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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