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 - 알퐁스 반 월덴의 14일
얀 포토츠키 지음, 임왕준 옮김 / 이숲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다음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재미와 몰입도.

언제부터인지 소설이 재미를 추구하면 통속적, 대중적이라는 비평 아닌 비난에 시달리는 사례가 자주 있다. 난해하면 할수록 고도의 순수성을 추구한 것으로 갈채 받고 독자의 층은 갈수록 엷어져 간다.

이 작품만큼 진가가 가리어지고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인 경우도 드물 것이다. 작가도, 작품도 논란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또한 이 작품만큼 독자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앗아가는 경우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진정 숨어있는 고전이라 하겠다.

알퐁스 반 월덴이라는 스페인 장교가 임지로 가는 도중 겪게 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기록한 글로 모두 66일 중 14일의 분량을 수록하였다. 전권의 판본은 폴란드어 사본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로제 카유아가 당시 프랑스어로 구할 수 있는 14일의 내용만 출판하여 이것이 일종의 정전(正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제1권과 제2권만이 오리지널로 인정받고 나머지는 위작으로 의심되는 상황과 비슷한 경우이다.

솔직히 민음사판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이탈로 칼비노 덕택이 아니었으면 포토츠키와 이 작품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민음사와 칼비노에 사의를 표한다.

이 작품은 일종의 액자소설이다. 그런데 단순 액자가 아니라 액자가 중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독서에 주의를 요한다. 그리고 액자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 알퐁스가 겪게 되는 모험을 직간접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알퐁스가 경험하는 사건과 마주치는 인물들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의 관점에서도 이단 내지 아웃사이드적 성격을 지닌다. 즉 교수형당한 쌍둥이 형제의 악령, 정체모를 쌍둥이 자매의 성적 유혹, 은자, 강도 조토, 카발라 유대 랍비 남매, 집시 등이다. 14일 동안 알퐁스는 여전히 시에라 모레나 산맥을 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초자연과 외설이 난무하는 이러한 작품을 남긴 포토츠키도 대단하지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외면당한(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유도 분명하다. 당대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단순히 허황된 잡설이 아니라 깊은 역사적, 지리적, 인문학과 종교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작품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람은 배가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말미의 카발라 비의주의는 상당히 깊숙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아, 내가 느끼는 재미와 감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저 한번 읽어보라고 손목을 끌어서 책을 건네주는 것 외에.

여기 소설에 등장하는 액자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헛소리는 집어치우련다. 짧은 것은 두 면 남짓하나 긴 것(예컨대 조토 이야기)은 웬만한 단편 소설은 거뜬하다. 또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책의 내용을 수록한 것도 있어 다채롭기 그지없다.

에미나와 주베이다 이야기
카사르 고멜레즈 성 이야기
악령에 홀린 자, 파체코 이야기
알퐁스 반 월덴 이야기
라벤나의 트리불체 이야기
페라라의 란둘페 이야기
조토 이야기
파체코 이야기
카발라 학자 이야기
티보 디 라 자케르 이야기
송브르 성 미녀 이야기
리키아의 메니포스 이야기
철학자 아테나고라스 이야기
집시 촌장 판데소나 이야기
기울리오 로마티와 몬테 살레르노 공주 이야기
몬테 살레르노 공주 이야기
레베카 이야기 

- 2011. 1. 2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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