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 전편에 수록되어 있는 노벨레 작품이다. 노벨레의 특성은 신기한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진 간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덧붙여 풍자성과 교훈성마저 갖추고 있으니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앞선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도 우월하다.
작품에는 일반적인 젤트빌라 사람들과는 다른 유형의 세 명의 빗제조공이 등장한다. 이들은 근면과 인내와 검소를 지상가치로 신봉하는 이들이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외형상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라는 호의적 평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켈러는 그들의 정의가 허울 좋은 외피에 감싸인 위선인지를 신랄하게 폭로하는데, 여기에 빗공장의 직원 감원과 취스 뷘츨린이라는 처녀와의 관계가 도화선 역할을 한다.
작가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조소와 희화화이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기이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급 유기체 즉, 기이한 작은 동물과 물과 공기에 의해서 우연히 그들의 번식의 자리로 옮겨지는 씨앗보다도 더 자유롭지 못한 인간과 같았다.” (P.20)
“그는 진정으로 영웅적인 현명함과 인내와 온화하면서도 비열한 냉혹함과 무감각이 혼합된 극도로 기이한 감정의 인간이었다.” (P.21)
여기서 자본주의 성숙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관점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공장 일과에 맞춰 생활 리듬이 단조롭게 굳어지고 삶의 희노애락에 무감각하게 변하는 자본주의 인간형이다. 노동자는 타락하고 자본가는 부유해지는 당대의 현실을 단순화시켜 비판하고 있다.
“장인은 이 세 사람이 오로지 여기에 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수도 없애고 음식도 더 적게 주었다...바보같은 노동자들이 밤낮으로 어두운 작업장에서 지칠 대로 지쳤으면서도 서로 일을 더하려고 하는 동안 그(장인)는 점점 더 허리띠의 구멍들을 늘려갔고 그 도시에서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P.27~28)
취스 뷘츨린은 정의와 위선의 또 다른 복합체다. 그녀는 고귀한 학식과 덕망을 지닌 듯 처신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적 탐욕에 물들어 있으며, 세 명의 빗제조공 중 그나마 돈을 조금 지니고 있는 욥스트와 프리들린이 경주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해 젊은 디트리히를 어설프게 유혹하려는 술책을 사용한다. 그러다 오히려 호젓한 숲 속에서 젊은 빗제조공의 열렬한 구애에 본인이 유혹당하고 만다. 즉 가장 가난한 빗제조공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욥스트와 프리들린의 비참한 말로에 동정을 금치 못한다. 그는 당대의 관점에서는 기이한 존재일지 몰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평범한 소시민일 따름이다. 그의 꿈은 소박한 것이었다. 무일푼인 노동자가 근면과 인내와 검소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여 자기 소유의 공장을 갖겠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대다수 월급쟁이의 바램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취스 뷘츨린이 일생의 안식을 구하기 위하여 사랑보다 유복한 남자와 인연을 맺고자 애쓰는 모습은 여성들이 남성의 지위와 경제력을 중요시하는 작금의 사고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켈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만연되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와 소시민계급의 표리부동한 행동양식을 과장된 수법으로 희화화하고 있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여전히 자본주의가 지배적 가치를 지니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내게 그것은 어릿광대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는 난장이의 느낌을 주고 있다.
* 참고로 이 책은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해볼 수 없다. 책표지 이미지라도 구하기 위해 네이버링과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여기 올린 책표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디카로 촬영한 것이다.

* <젤트빌라 사람들> 번역본이 근래 출간되었다. 완역이 아니라 대표작 4편만 수록되어 아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럴듯한 판형으로 출간된 최초의 책이니만치 의의는 충분하다. (201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