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 출간 10주년 기념 개정합본판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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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유명한 화가들이다. 두 사람의 풍속도는 각자의 개성이 넘치면서도 조선 후기의 변모하는 시대상을 잘 담아낸 독보적인 명품이다. 이 작품은 혜원과 단원을 주요 인물로 삼아 당대의 사회와 예술세계를 그려낸 역사소설이다. 꽤나 인기를 끌어서 훗날 드라마와 만화로도 나오기도 하였다. 원작은 두 권짜리인데, 이 책은 출간 10주년 기념 개정합본판이다.

 

이 작품을 역사 시각에서 보면 상당한 흠결을 지닌다. 체감상 1/4 또는 1/3 정도만이 사실에 근거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두 화가와 관련하여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통해 두 화가를 처음 접하게 되면 상당한 편향된 관점을 지니게 될 우려가 있다. 물론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특히 혜원은 한두 줄에 불과하다)에 역사 사실의 분량이 작을 수밖에 없음을 고려해야겠다. 반면 미술 감상의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상당히 유용한데, 단원과 혜원의 대표적 풍속화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음미하는 데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는 점이다.

 

역사로서 단점이지만 소설로서 두드러진 특장점은 작가가 여백에 채워 넣은 흥미로운 허구적 사실에 기인한다. 등장 사건과 인물 관련 중요한 사항은 죄다 허구다. 사도세자 어진, 도화서 독살 사건은 역사 기록에 부재한다. 단원이 색맹이며 혜원은 여자라는 가설도 재밌지만, 근거 없는 설정이다. 두 사람이 풍속화를 그린 계기가 정조의 명에 따른 것이라는 설정도 신선한 착상일 뿐이다. 사실이 부재할수록 상상의 영역은 넓어지게 마련이다.

 

사실 이 작품을 읽게 된 동기는 김홍도에 관한 책을 읽은 후 신윤복을 다룬 책을 읽고 싶었는데 마땅치 않아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찾아보게 되었다. 그만큼 신윤복의 신상에 대해서는 공백이나 다름없다. 화원 신한평의 자식이라는 것과 도화서 화원, 첨절제사라는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부. 이 중에서 뒤의 두 항목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다. 중인에 해당하는 도화서 화원 명단의 기록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첨절제사라는 벼슬을 지낸 자에 대한 아무 기록이 없다는 점은 기록의 왕국인 조선 왕조를 안일하게 인식하는 셈이다.

 

내가 별이었다면 그는 밤하늘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그 빛은 차라리 재앙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바로 그 자신에게도. 뜨겁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재앙,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어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재앙,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재앙. (P.12)

 

비교적 동시대 인물이지만 단원이 혜원을 알고 있었는지, 라이벌로서 의식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천재 화가 단원이 혜원의 넘사벽 재능에 경외심과 절망감을 느꼈다고 강조한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개인적 추론이며, 두 화가 사이의 서로 다른 예술성에 우열을 두고자 하는 무리한 설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궁금한 것은, 단원의 그림에는 늘 일하는 사내들이 등장하는데 혜원의 그림에는 언제나 무언가 비밀을 감춘 듯한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P.202-203)

 

이건 비단 정조뿐만 아니라 혜원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이가 궁금해할 의문이다. 남자 화원으로서 오로지 여자만을 주된 인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더구나 남자 화원이 기생집은 물론 여염집 내실의 은밀한 상황을 관찰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혜원의 화풍이 보여주는 세밀한 필치와 눈부신 색채감은 또한 어떠하고. 이런 의문에 기반하여 혜원이 사실 여자라는 가설을 전개하였던 것은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

 

소설의 전반부가 정조와 두 화원이 개입한 치열한 그림 대결이었다면, 후자는 갑자기 추리소설로 변모한다. 도화서 살인 사건 해결과 잃어버린 사도세자 어진 찾기라는 밀명. 여기부터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나뉠 것이다. 소설 본연의 허구성과 재미를 중시하면 선호, 역사성과 예술성에 대한 논의를 좋아하면 비호.

 

후반부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김조년이다. 천민 출신 고아에서 시작하여 거상으로 성장하고 양반의 신분까지 획득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실제와 허구를 떠나 이러한 유형의 인물을 소설에서 그려낼 수 있음이 조선 후기 조선 사회와 경제가 발전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게다가 그가 보여주는 심미안과 감식안은 예술의 발달에 있어 경제력을 갖춘 시민사회의 성장이 필수적임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도화서 살인 사건의 교사자가 아니었다면, 혜원과 단원의 무리한 도사 대결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전 재산을 거는 무리한 도전을 해서 일거에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이 남는 까닭은, 박안식을 비롯한 양반들의 그를 향한 질시와 반감이 큰 탓이다.

 

김홍도... 신윤복... 김홍도... 신윤복...”

중얼거림은 곧 웃음이 되어 허물어졌고,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갔다가 다시 흐느낌으로 잦아들었다.

그 헛헛한 울음과 흐느낌은 한 남자가 평생을 쌓아 올린 견고한 담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뜨거운 욕망과 꿈을 버무려 쌓아 올린 거대한 벽. (P.468)

 

생존을 위해 남장을 해야만 했던 혜원. 더 이상 남장의 필요가 사라진 혜원은 숨겨왔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지막으로 내보인다. 최고 명작인 <미인도>가 혜원의 자화상이라는 설정은 종지부를 찍는 충격적 해석이다. 그리고 본디부터 의지할 곳 없고 매인 데 없던 혜원은 길을 나선다. 여기서 단원의 추억과 회한이 겹친다. 화원으로서 우애와 경쟁심, 이성으로서 애정, 스승으로서 넘어설 수 없는 도덕적 금기. 이것이 그를 망설이게 하고 끝내 늙어서까지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바람의 화원이었다. 바람처럼 소리 없고, 바람처럼 서늘하며, 바람처럼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찾아 떠나는 그 길을 차마 나는 나설 수 없었다. (P.485)

 

소설적 허구를 감안한다면, 단원과 혜원의 대표작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좀 더 알고 싶은 독자에게도 비판적 조건으로 추천해도 괜찮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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