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12월
평점 :
내친김에 모지스 할머니 관련 책을 더 읽는다. 이 책은 모지스 할머니가 1952년, 92세의 나이에 출간한 자서전이다. 할머니가 101세의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자서전 이후로도 9년을 더 사신 셈이다.
평범한 일생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아 유명인이 되었을 때 놀람과 기쁨과 얼떨떨함이 혼재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80세에 첫 전시회를 열고, 93세에 <타임>지 표지모델이 되고 100세에 ‘모지스 할머니의 날’ 선포를 경험한 그녀가 바로 그렇지 않을까. 심지어 이 책이 출간된 당시 그녀는 아직 명예의 절정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부터 삶을 회고하는 모지스 할머니의 일생은 가장 보통 가정의 전형적인 여성의 삶 그 자체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찍부터 밥벌이를 위해 다른 사람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가정주부의 자질을 익히는 등 일련의 과정이 그러하다. 의학 기술의 충분하지 못한 수준으로 그녀는 여러 형제자매를 잃어야 했고, 훗날 결혼하고 나서는 열 명의 자녀 중 다섯을 일찍 묻어야 했다. 유아기 죽음이 다반사라고 해도 결코 슬픔이 작지는 않을 것인데 그녀는 삶을 담담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시련이 있긴 했지만 그저 훌훌 털어버렸지요. 나는 시련을 잊는 법을 터득했고, 결국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P.111)
남부에서, 그리고 이글 브리지로 돌아온 후에 이르기까지 술회한 할머니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녀만의 삶의 특징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다. 자신의 말처럼 그녀는 언제나 부지런함을 유지한다. 버터와 우유를 팔고, 감자 칩 사업을 하고 잼을 만드는 등 그녀는 남편의 경제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한다. 자수를 놓다가 관절염으로 어렵게 되자 낙담하지 않고 붓을 들어 그림을 시작한 것도 모지스 할머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덕분에 그녀가 후세에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만약 그림을 안 그렸다면 아마 닭을 키웠을 거예요. 나는 절대로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날 도와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진 못해요. (P.272)
무병장수는 모든 사람의 꿈이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신은 멀쩡하지만, 배우자와 특히 자녀가 본인을 앞서 세상과 작별하는 모습을 보는 건 다른 의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다. 할머니는 딸과 아들을 앞서 보냈다. 그녀의 붓은 인생의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행복, 불행의 모든 추억을 담는다. 슬픔과 불행을 여과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남겨서 캔버스에 올려놓는다. 그녀의 그림을 볼 때 받게 되는 아스라한 그리움과 은은한 따뜻함, 흐뭇한 즐거움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연의 풍경이라든가 낡은 다리, 꿈, 여름이나 겨울 풍경,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을 그립니다.
나는 언제나 보기 좋고 즐거운 풍경을 그립니다. 알록달록하고 북적북적한 게 좋아요. (P.259)
미술사적으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아마추어의 작품으로 치부되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에 수록된 70편에 가까운 그림들 하나하나는 보는 이에게 뭉클한 추억과 감정을 되새겨준다는 면에서 높은 의미를 지닌다. 문화가 다른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일진대 미국 사람들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좋았던 옛 시절의 낭만을 회상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각박한 현대사회일수록 더더욱 커가는 아쉬움이자 그리움이리라.
나의 삶을 돌아보니 하루 일과를 돌아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고 내가 이룬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P.275)
제아무리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하지만, 고희를 넘어선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더 이른 나이에 활동의 폭과 양을 줄이고 고요하고 평안한 여생을 누리는 준비를 시작하게 마련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 즐거움을 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체로서 삶의 기쁨을 찾아 노력하였다.
누구나 다 모지스 할머니 같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아니 기대해서도 안 된다. 다만 나이 들었다고 제풀에 주저앉지 않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삶을 즐기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꾸준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최고의 삶으로 회고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