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트라이벨 부인 - 국내 초역
테오도어 폰타네 지음, 양태규 옮김 / 부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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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마음이 마음과 짝을 이루는 곳

 

테오도어 폰타네의 소설은 몇 권 읽었다. <에피 브리스트>, <마틸데 뫼링>, <얽힘 설킴>. 이제 <제니 트라이벨 부인>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다시 폰타네를 읽는다. 일단 표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니 트라이벨 부인>이 원어에 충실하다, ‘제니는 영어식 독법인데.

 

폰타네 소설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평가하는 게 일반적인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불행을 겪는 여주인공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에 얼핏 동정적으로 비치지만 작가의 태도는 지극히 냉랭하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해학적이고 냉소적이기도 하다. 작가가 반여성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여성의 행태를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과 세태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주도적인 여성이 나온다. 트라이벨 부인. 그녀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하여 상업고문관 부인이라는 경칭을 듣는 지위에 오른다. 그녀가 코린나와 슈미트 교수에게 하는 말을 전혀 가식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은 어떠한 이해관계도 엮이지 않은 경우에만 유효할 뿐이다.

 

, 우린 코린나 양, 내 말을 믿으세요, 수수한 환경이야말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것입니다.” (P.22)

 

그렇기에 그 아이는 현명한 여자가 필요해요. 정말 현명한. 지식과 현명함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차원 높은 것. 그것이 중요하죠.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가치가 없어요. 모든 외양적인 것은 참담합니다. (P.168)

 

전자에서 트라이벨 부인은 물질적 삶을 추구하려는 코린나의 말을 비판한다. 후자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 레오폴트의 배우자는 외적인 조건은 필요 없이 현명한 여성이면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모두 그럴듯하지만 독자는 이미 제니가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인물임을 알고 있다. 젊은 시절 제니는 슈미트 교수와 시와 사랑으로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트라이벨에게로 방향을 급선회하였다. 슈미트 교수의 적확한 평가처럼.

 

그 당시에도 그녀는 감상적인 것을 사랑했지만 구애 행동과 생크림이 먼저였지. (P.25)

 

슈미트의 딸 코린나는 교양과 정신적인 삶을 중시하는 아버지와 달리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 그녀는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레오폴트의 마음을 유혹하고 과잉 교태를 부려 끝내 약혼을 이끌어낸다. 코린나에게 사랑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요한 건 결혼이 인생을 뒤바꿀 절대적 수단이라는 점이다. 독자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결혼에서 소위 사랑이 절대적 지분을 차지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생면부지의 사람과 결혼하는 예도 비일비재한데 그에 비하면 코린나와 레오폴트는 최소한 서로를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가. 어쨌든 코린나는 자신의 말처럼 그와 결혼하고자 하는 뜻은 진지하다.

 

제니는 트라이벨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하였지만 만족하지 않는다. 첫째 사돈댁이 자신들을 약간 무시하는 것 같아 레오폴트와 첫째 며느리의 여동생 힐데가르트와 결혼 추진을 탐탁지 않아 한다. 이 때문에 고부간 사이가 다소 껄끄럽다. 여기서 우리와는 다른 결혼 풍습이 생소하다. 오토와 헬레네, 레오폴트와 힐데가르트의 결혼은 겹사돈에 해당하고, 코린나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마르셀은 코린나와 사촌 관계다.

 

둘째 제니는 트라이벨은 남편으로 존중할 뿐 존경하지 않으며, 상업고문관 부인 지위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는 정체에 답답해한다. 그녀는 레오폴트의 결혼을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바람을 지닌다. 여기에 가난한 코린나가 갑자기 끼어들었으니 펄쩍 뛸 수밖에.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트라이벨이 더 개방적이고 소탈하다. 코린나를 향한 제니의 날 선 비난의 외침에 대해 그는 솔직하게 맞받아친다. 한마디로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격으로.

 

당신은 매우 심각한 것을 고집하니 이제 나 또한 심각한 말을 하겠소, 당신이 거기에 쏟아낸 말들은 첫째, 터무니없고, 둘째로 불쾌하오. 그리고 또 뭐였더라, 맹목적이고, 건망증에, 오만하고,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소... (P.198-199)

 

제니의 반대가 격심하더라도 레오폴트의 의지가 굳건하였다면 코린나와 결혼은 끝내 성사되었을 수 있겠지만, 작가의 본의는 이게 아니다. 레오폴트는 결국 마마보이였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만다. 코린나는 마르셀과, 레오폴트는 힐데가르트와 이어지는 것으로.

 

부제는 크롤라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서 따왔다. 예니가 부를 때는 감흥이 없지만 일련의 사건이 지난 후 크롤라가 부르니 의미가 더욱 생생하다.

 

, 오직 그것, 그것만이 인생이지,

마음이 마음과 짝을 이루는 곳. (P.253)

 

언뜻 코린나의 행동을 지칭하는 노랫말이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코린나의 행위에 부정적이다. 선량하고 가엾은 레오폴트를 코린나가 좌지우지해서 흔들어놓았다는 것으로. 제니는 물론이고 아버지 슈미트 교수, 가정부 슈몰케마저도. 하지만 우리는 코린나를 손가락질하지 못한다. 부모와 주변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의사로 배우자를 고르고자 하는 레오폴트. 답답한 현상을 탈피하여 제2의 제니가 되고자 하는 코린나. 제니는 괜찮고 코린나는 안 된다는 논리는 불합리하다. 어쨌든 두 사람의 마음이 선택하여 내린 결정 아니겠는가. 코린나의 반론이 가슴 시린 것은 유독 이것 때문이리라.

 

이 소설에서는 주된 서사를 감싸면서 당대 사회를 조감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가 작품을 풍성하게 한다. 슈미트 교수와 지인들의 교양이 넘치는 저녁 모임과 지적 대화. 부르주아 계층이 할렌 호수에서 갖는 소풍 장면, 트라이벨의 실패한 정치 참여. 무엇보다 신흥 유산시민 계급의 부와, 전통 교양 계급의 교양 간 대비가 빚어내는 긴장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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