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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생활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3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이 작품은 독특하다.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지만, 진짜 편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수신인이 받아 읽다가 양과 내용에 질려서 짜증 나고 던져버리고 말 것이다. 굳이 유형으로 나누자면 에세이에 가깝다. 가벼운 수필이 아니라 몽테뉴의 에세이 같은, 그리고 다소 난삽한.
저자의 핵심적 메시지는 첫 번째 편지에 담겨 있다. 저자는 ‘고독한 생활’을 권한다. 페트라르카는 무슨 까닭으로 고독한 생활을 권유하는가? 저자가 말하는 고독한 생활은 정확히 어떤 생활을 가리키는가? 이런 궁금증에 저자는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펜이 흘러가는 대로 죽 서술해 나간다. 그렇기에 전체적 구성과 논리 전개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의지하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진지한 연구에 몰두하든,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룬 마음을 찾고 있든, 우리는 사람과 혼잡한 도시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P.25)
저자는 독자에게 혼잡함에서 떠나라고 조언한다. 행동하는 사람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의 예시를 통해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확실히 누구라도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날 수 있다면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사람은 홀로 조용한 곳에 있을 때 간과했던 일상과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마련이다. 창작 활동에 종사하는 경우 집중과 영감을 위해 남들이 다 잠든 한밤중과 새벽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수도 생활을 하는 종교인이라면 고독한 생활의 필요성을 응당 절감하게 되는데, 수도원이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에 위치하거나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등의 까닭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고독은 유일한 증인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며, 맹목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대중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신뢰를 두고 있습니다. (P.63-64)
페트라르카의 논의에서 불명확한 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독은 물리적 고독과 정신적 고독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가. 무인도와 첩첩산중, 오지 같은 곳에 가야 비로소 고독함이 가능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히는 강제적 고립도 고독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리적 고독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상황에서 정신적 고독은 과연 가능하지 않은가. 자칫하면 은둔과 낙향 등을 권유하는 듯한 뉘앙스를 지닐 수 있다.
저자가 고독함을 강조하는 것은 여가와 자유를 위해서인데, 생활인이라면 평상시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못하고 은퇴 이후에나 꿈꿀 수 있다. 저자 역시 고독한 생활과 은퇴 후의 삶은 혼용해서 말하고 있다. 정말로 은퇴 후에나 가능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외적인 극소수만 가능한 삶을 말하는 것이므로 부적당하다. 그렇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여가와 자유라면 저자가 미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이고 풍요로운 고독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문학이 없는 고립은 망명, 감옥, 고문입니다. 문학이 주어지면 고립은 당신의 나라, 자유, 그리고 기쁨이 됩니다. (P.56)
고독은 친구의 존재로 인해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진다는 것은 결코 내 견해가 아닙니다. 둘중 하나 없이 살 수 있다면, 친구보다 고독을 빼앗기길 택해야 합니다. (P.99)
은퇴 후에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사람, 생활인이지만 일정 기간 이상의 여가를 구할 수 있는 사람 정도가 저자가 말하는 조건에 부합할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 고립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독은 외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뜻에 맞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유지되어야 하고, 문학 같은 정신적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취미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독한 생활을 일반화하여 추구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페트라르카 자신도 그의 주장 대다수를 위한 게 아님을 밝힌다. 우선 자신의 기질이 고독한 생활에 어울리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도시의 번잡한 생활이 필요하고 여기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기질을 거슬러 굳이 고독한 생활을 좇을 이유가 없다. 저자 자신은 기질상 여기에 끌리기에 고독한 생활을 주창하는 것이지, 남들에게 무조건 설파하지 않는다.
이 글이 논설문이 아니고 에세이에 가깝다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저자는 순전히 자신의 기질과 사고에 근거하여 고독한 생활이 주는 미덕과 장점을 보여 주고, 자신이 그러한 삶을 지향함을 독자에게 공개한다. 저자의 의견이 마음에 든다면 뜻을 같이하면 족하고 마땅치 않다면 외면하면 그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규칙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원칙을 밝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원칙을 좋아한다면 그가 이 제안을 따르도록 하세요. (P.54)
두 번째 편지는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다. 저자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여러 예시가 한가득 제시된다. 첫 번째 편지는 읽기가 괴로운 반면, 두 번째 편지는 역사적 이야기를 받아들이듯이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명한 철학자, 시인, 성경 속 인물, 성인들의 목록이 줄줄이 이어진다. 모세, 아우구스티누스, 교황 그레고리우스, 예수 자신, 그 외 잘 모르는 기독교 성인 등등. 게다가 유럽 기독교 문명을 넘어 북구의 민족과 인도 브라만까지도 소환한다. 와중에 기독교 세력 간 분쟁과 다툼에 한탄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판하는 대목은 결코 세속을 떠날 수 없었던 페트라르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쨌든 저자는 무수한 사례를 통해 고독한 생활의 가치와 미덕을 계속해서 주창함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대다수의 일반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특이한 기질을 지닌 소수의 사람을 위해 이 논의를 밝히고 있음을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
고독한 생활은 고전과 문학을 애호하고 탐구하며, 집필과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싶어 하는 페트라르카 같은 인물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우리 같은 범인들은 어차피 현실적으로 고독과 번잡의 극단적 배제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독한 생활에서 중요한 건 정신적 고요와 평온이라고 할 때, 일상에서 잠시만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번 호흡을 가다듬거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면 미흡하나마 자체로 의미가 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