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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의 태양 히타이트 제국 - 김경상 사진집
김경상.이기우 지음 / 학연문화사 / 2024년 12월
평점 :
히타이트 제국을 다룬 신간이 나왔고, 게다가 유물과 유적 사진집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크다. 앞서 두 권의 히타이트 관련 도서를 읽었지만 시각 자료의 부족함에 아쉬움이 컸다. 내가 튀르키예로 여행 가서, 그것도 히타이트 유적지를 방문한 기회를 얻을 가능성을 기약할 수 없으니 말이다.
신국판보다 큰 판형, 4백 면에 가까운 두툼함, 고급지를 사용한 묵직함까지 사진집에 어울린다. 그런데 책을 펼치는 순간 당황스럽다. 흔히 생각하는 사진집이 아니다. 사진과 글의 비중이 대등하다. 사진작가의 약력을 보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사진을 다큐멘터리에 접목하였으니 글의 비중이 크고 역할이 중요하리라 짐작한다.
우리가 스핑크스 게이트를 지나려 할 때, 마치 그 문이 고대의 의식에 우리를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들어가자! 이곳에서 우리는 신성한 세계와 맞닿을 수 있을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망적으로 외친다. 이 순간, 고대 히타이트의 신화와 전설이 살아나는 듯, 우리의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이 솟구친다. (P.45)
이것이 사진집인가, 다큐멘터리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여행 수상록인가? 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은 없다. 더 많은 사진이, 더 큰 크기로 수록되었으면 하는 정도. 글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감성적 문장이 사용되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시종일관 영탄적이며 감상적 문장이 난무한다. 주관적 감상의 과도함은 오히려 독자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다. 아니면 나의 감성과 상상력이 빈곤하여 글쓴이와 공감을 못 하는지도 모르겠다.
섬세한 문학작품과 미술작품도 아닌 폐허의 잔해와도 같은 성벽과 돌, 깨어진 부조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감명과 통찰력, 경이를 느낄 수 있는가. 문학적 영감을 투사했다면 할말 없지만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던가. 131면의 한 부조에 대한 설명을 예시로 든다. 과도한 상상력과 문학적 표현을 남용하였는데, 글쓴이가 부조에서 이를 찾아냈다면 대단한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왼쪽에 서 있는 저글러는 긴 머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몸짓은 우아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녀가 단발을 삼키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듯한 열정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저글러의 시선은 관객을 매료시키며, 그녀가 던지는 물체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이 빛난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자신감과 끈기가 가득 차 있다. (P.129)
너무 비판적이지 않나 싶지만 그만큼 실망의 깊이를 반영한다. 사실 더 많은 비판은 편집과 교정을 향해야 한다. 부실하거나 산만한 원고라도 편집자의 꼼꼼한 가감과 배치, 교정을 거쳤다면 보다 깔끔한 책이 되었을 텐데 이 책에서 그 역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중복되는 내용이 두서없이 반복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반드시 그래야 할 당위성이 없으므로 편집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내용 중복 사례는 P.255-256과 P.256-260을 비교하면 금방 드러난다. 히타이트 번영과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부분이다. P.326-333도 마찬가지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고대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인데, 앞부분에 언급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다.
교정의 오류도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김해 금관가야 유물을 열심히 소개하는 대목에 뜬금없는 성산 대가야 사진 설명이 들어가거나(P.167), 5장의 카라테페 요새를 방문하는 내용인데 갑자기 야즐르카야 방문길이라고 적고 있다(P.192). 참고로 야즐르카야는 2장에서 다룬다.
각 장의 배치도 유기적 맥락이 취약하다. 4장 히타이트와 고대 한국 유물의 연관성은 뜬금없으며, 8장은 히타이트라기보다 아시리아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가깝다. 5장은 후기 히타이트에 해당하는데,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 이후이므로 순서상 가장 뒤편에서 다루는 게 합당하다. 9장은 박물관 유물 소개의 글을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사진집은 사진이 중심을 차지하고, 글은 사진 내용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견해다. 책 전반부에서 히타이트 역사 개요를 충실히 쭉 훑어 사진 이해의 기초 지식을 제공한 후, 본문은 하투샤, 야즐르카야, 알라자휘육, 카라테페 요새, 퀼테페 유적과 유물이 히타이트 역사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슨 연관성과 의의를 지니는지 덧붙이면 충분하다. 독자들이 이 책을 집는 이유는 결국 사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히타이트 제국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수록한 사진이 다소간 도움이 되겠지만, 초심자라면 글 따로, 사진 따로의 편집으로 전체적 내용 이해가 쉽지 않으리라. 출판 자체가 워낙 희소한 히타이트 관련 서적이고, 글로만 접하게 마련인 유적, 유물 사진을 좋은 품질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뛰어난 기획이다. 감상평도 이에 부합하여 좋게 평가하고 싶지만 솔직히 다소간 실망스럽다. 기획에 미치지 못하는 문자 콘텐츠와 편집, 교정의 수준이 두드러져 읽는 내내 진한 아쉬움을 남겨준다.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역작이 나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