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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의 역사 ㅣ 더숲히스토리
쓰모토 히데토시 지음, 노경아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4년 11월
평점 :
보기 드문 히타이트 역사서다. 게다가 최근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원서도 작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그동안의 간극을 뛰어넘는 최신 연구 성과를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크다.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는 앞서 읽은 이희철의 <히타이트>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하였다. 극적인 발견, 히타이트의 유래, 선주민 하티,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 이집트와 벌인 세계 대전과 평화 조약, 갑작스러운 멸망에 이르기까지.
결과적으로 이 책이 전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였다. 여전히 히타이트의 많은 것이 공백 상태에 놓여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다만 기존에 간과했던 여러 사항의 의미를 새삼 인식하게 되었는데, 북쪽 카스카족의 지속적 위협의 심각성이 그러하다. 히타이트는 남쪽과 동쪽으로 세력 확장을 꾸준히 도모하면서도 인근의 카스카족, 수도 하티마저 한때 약탈당했으면서도, 그들에 대해서는 확고한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 책은 당대 기후 불순에 따른 흉작을 언급하고 있다. 산지가 많은 나라 특성상 그들은 생존을 위해 평야 지대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히타이트의 멸망은 여전히 모호하다. 북방 해양 민족의 습격으로 패망했다고 하는데, 미심쩍은 점이 여럿 있다. 하나는 국세가 약해졌다 해도 히타이트가 급작스럽고 흔적 없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게 가능하냐는 점이다. 투드할리야 4세는 건설왕으로 불릴 정도로 여러 비문과 시설을 남겨 놓았는데, 나라가 위기 상황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군주 수필룰리우마 2세가 특별히 폭군 또는 혼군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타르훈타사를 포함한 여러 곳을 정복하였다. 저자도 이 책에서 히타이트의 멸망 원인의 해양 민족설에 유보적 의견을 밝힌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황에서 해양 민족의 등장이 방아쇠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앞 장에서 말했듯 히타이트 제국 말기에 아나톨리아가 심한 가뭄을 겪었을 가능성이 큰데 이 역시 제국을 지탱했던 제도들이 붕괴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해양 민족들’의 이동과 기후 변동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가지 원인만을 꼽기는 어렵다. (P.131)
우리는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 그들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후기 히타이트 국가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고찰한다. 그들 왕가의 분가가 다스렸던 타르훈타사 부왕국과 카르케미시 부왕국이 수백 년간 존속했음을, 성서 언급과의 관련성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 유산 킬리키아 왕국도.
이 책의 전체 13개 장 가운데, 전반부 6장이 히타이트 역사를 다루었다면 후반부 7장은 히타이트의 사회, 종교, 외교, 도시, 생활 등을 주제별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히타이트 제국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셈이다. 철의 나라 히타이트에 대해 저자는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히타이트는 청동기 제국이라고 단언한다.
히타이트는 관용성이 풍부한 나라였다. 피정복 지역이나 이웃 국가의 문화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언어와 문자도 바빌로니아식 쐐기문자를 주로 사용하지만, 우리가 외래어를 혼용하듯 수메르어와 바빌로니아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며, 상형문자를 쓰기도 하였다. 종교에서 있어서도 천신(千神)의 나라라는 별칭처럼 다양한 신을 섬겼다. 그들 고유의 애니미즘은 물론 피정복국 신을 자기들 신의 하나로 추가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특히 국가 제사의 경우 왕이 직접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군사 행동도 이에 제약받는 사례도 있을 정도다.
히타이트의 최고 병기는 전차라고 한다. 비무장 또는 경무장한 보병에 대해 전차는 절대적 우위를 지닐 수 있었는데, 만약 중무장 보병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저자는 히타이트를 괴롭히고 멸망시켰던 세력들이 보병 집단전이라는 새로운 병기와 전법을 사용하여 오히려 기존 문명을 압도하였을 가능성을 다른 학자의 입을 빌려 언급한다. 또한 반복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기후 변동을 여러 증거로 제시한다.
쿠샤클르 발굴을 통해 보아즈쾨이 이외의 히타이트 도시 유적의 전모가 처음으로 드러났고 히타이트인의 생활과 기술에 관한 정보가 다양하게 알려졌다. (P.257)
기존의 보아즈쾨이, 알라자회위크, 카만칼레회위크 등의 유적지 외에도 오르타쾨이, 쿠샤클르 등이 새로이 발굴되면서 히타이트 도시의 구조와 기능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는 성과가 나왔다고 한다. 여전히 많은 도시와 시설들이 땅속에 묻혀 있기에 히타이트 제국의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왕의 무덤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고대 국가는 왕릉 발굴을 통해 많은 사료와 유물을 입수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기존에 히타이트 개설서를 이미 읽었기에 이 책에 나온 많은 내용이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전혀 초심자라면 이 책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고대사와 고고학의 매력도 흠뻑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무대로 유명한 트로이는 소아시아의 난데없이 등장하는 생뚱맞은 도시국가가 아니라는 사실. 히타이트 시대에 윌루사 또는 히사를리크로 추정되는데, 독자적인 강력한 세력을 지닌 채 히타이트와 맞섰던 곳이라는 점. 그렇기에 훗날 그리스 연합군과 장장 십 년 넘는 장기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임을 추론할 수 있게 된 점은 의외의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