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낯선 여인의 편지>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당신만을 알고 있습니다.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러 다양한 것들을 누리며 즐기던 당신을, 저를 알지 못한다 해도 제가 항상 사랑했던 당신만을 알고 있습니다. (P.91)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받는다면 누구라도 당혹하게 마련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편지란 말인가, 수신인이 잘못된 게 아닐까, 그녀는 도대체 누굴까, 자기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왜 내게 알려주는 걸까 등등. 이 소설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발신인이 자신의 정체를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수신인은 그녀의 편지를 다 읽을 수밖에 없다는 점. 물론 웬 생뚱맞은 편지란 말인가 하고 한구석에 휙 집어 던지고 다시 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수신인의 성향에 맞지 않음을 이미 발신인도 알고 있지 않겠는가.

 

편지의 내용은 한 여인의 삶과 사랑에 관한 고백이다. 소녀 시절부터 수신인을 향한 일편단심 지극한 연모의 마음을 품게 된 여인, 어떻게든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 받고 싶다는 열망, 비록 그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여기에 사랑의 전형적인 속성이 드러난다. 연인은 자기 삶의 전부이고, 자기 존재 의미는 연인에 있으며, 그의 모습을 보고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이 정도 순애보라면 남자가 여인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남자는 소위 바람둥이다. 그에게 자신의 첫사랑을 바치고 그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여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지극한 소망이었기에.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당신의 아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 아이는 당신의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 삼 일간의 밤에 생긴 아이였습니다. (P.123-124)

 

여인은 충격적 진실을 토로한다. 죽은 자기 아이가 사실 수신인 남자의 아이라고.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아이를 통해 대리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그녀. 딱 한 번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절규했던 순간이 있었으나 남자는 끝내 알아차리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여자는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여인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남자는 기억 회로를 열심히 가동해 보지만 절대로 그녀를 되살려내지 못한다. 그에게 편지를 보낸 그녀는 완전히 낯선 여인이다, 이름도 얼굴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앞으로도 그는 그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목숨도 다했음을 알리기에.

 

독자는 이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남자의 방탕함과 무신경함을 비난해야 마땅한가, 여인의 고루하고 수동적인 사랑의 태도를 딱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일까, 당대의 어쩔 수 없는 삶과 사랑의 양태를 보여주는데 더 큰 까닭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직접적 사건 서술과 대화 형식보다는 편지라는 고백체의 일방적 전달 형식을 통해서. 수신인은 일방적으로 당하고 기다리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편지글을 곱씹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어느 순간에 마주쳤던 여인들과 연계하여 여인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맹렬히 애쓰지 않겠는가. 조금씩 사실을 드러내고 알려주며 독자를 감질나게 하고 추론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참된 묘미다.

 

<체스 이야기>

 

츠바이크의 마지막 작품이다. 나치를 피해 머나먼 브라질 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작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창 나치가 맹위를 떨칠 때 문명 세계는 더는 희망 없다는 절망감과 두고 온 세상을 향한 향수병이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았으리라. 이 작품에서 나치가 주인공을 심리적 극단 상태로 내몬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절대적 열대와 냉대 지역에서 생존할 수 없듯이 우리네 감각기관이 극단적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예전에 한 번 무향실에 들어가 본 적 있었는데, 절대적 고요함이 오히려 환청을 유발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B박사가 맞닥뜨린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P.45)

 

생명은 움직이고 활동하는 현상이다. 아무런 정신적, 신체적 활동도 없고 홀로 고립된 상태에서 할 일도 금지당한 존재는 비생명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그 존재가 매우 지적인 생명체라면 효과는 극적이다. 주인공이 여봐란듯이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업그레이드되어 등장하는 설정은 영화에서만 가능하다. 육체적 고문도 무섭지만 정신적 고문도 이에 못지않다.

 

B박사는 우연히 입수한 체스책으로 심리적 위기 상황을 헤쳐나올 수 있었지만, 무한한 시간 속에 그것도 한계를 보이고 이내 혼자서 블라인드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하는 체스 게임을 혼자서 한다는 것은, 재미 삼아 장난으로 두지 않는다면 정신을 둘로 갈라야 가능한 법이다. B박사의 발작은 결국 정신분열증이 아니겠는가. 나치의 심리 고문을 극복했던 B박사는 체스 게임으로 자초했던 심리 위기는 이겨내지 못하였다.

 

체스를 두면서 흥분이 점점 더 고조되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한순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P.66)

 

첸토비치는 B박사의 과거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B박사가 보이는 여러 행동과 반응을 보고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접어들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한다. 최대한 천천히 시간 끌기, 상대방이 무위한 기다림에 지치고 견딜 수 없어 제풀에 허물어지기를 노리는 심리 전략이다. 다른 고수라면 적당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B박사는 그렇지 못하다, 정신적 외상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음을 화자와 독자는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서두에 체스 세계 챔피언 첸토비치를 소개하면서 화자가 그를 편집광적인 인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첸토비치는 오로지 체스만 잘 둘뿐 그 외는 무지하다. 블라인드 체스를 못 둘 정도로 상상력도 빈약하다. 나치가 B박사에게 가하는 심리 고문과, 첸토비치가 B박사에게 행하는 심리 전술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뿌리를 지닌다. 작가가 화자의 입을 빌려 묘사하는 첸토비치야말로 체스계의 히틀러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이 세계를 오로지 검정과 흰색 사이의 좁은 일방통행으로 축소시키고, 서른두 개의 체스 말을 단순히 앞뒤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데서 삶의 성취감을 찾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민활한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사실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가.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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