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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평점 :
<흉노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중국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흉노를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북흉노의 쇠망과 이후 남흉노의 점진적 소멸로 동양의 흉노 세력은 실체를 상실하였다고 보며, 흉노와 훈의 동일성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취하는 저자의 관점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인가 아니면 전혀 무관한 관계인가. 이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이것이다. 올해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며, 외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며 영어로 쓴 저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내놓았다. 무엇보다 ‘흉노와 훈’을 타이틀로 내걸지 않았는가. 간단히 표현하면 이 책은 무지하게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역사서다.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탐험하며 어둠에 감춰졌던 사실에 환한 빛을 비추어 세상 밖으로 드러낸 역작이다.
흉노와 훈의 관련성에 대하여 저자의 입장은 명백하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이다. 우선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훈이라는 이름 자체가 흉노에서 연원하였다고 단언한다. 또 하나, 소위 200년의 공백은 어찌 볼 것인가. 역사 기록이 부실하여 공백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 역시 과거 사료와 최근 연구를 토대로 볼 때 지정학적, 기후적 요인 등으로 흉노는 점차 서진하여 훈으로 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힌다.
서양사에서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해 서로마제국을 멸망의 길에 이르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틸라의 야만족 대제국이 유럽 중앙에 딱 버티고 앉아 문명 세계를 파괴한 것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유럽의 뿌리가 깊은 편견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비판하며 훈족은 게르만의 저항 때문에 붕괴한 게 아니라 내홍으로 무너졌으며 상당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음을 주장한다. 무엇보다 훈족 세력이 무지한 야만 세력이 아니라 발달한 중앙아시아 문명을 경험하고 받아들여 고도의 국가 체제를 완비한 제국이었음도 역설한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히 국가로서 존재했다. (P.155)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바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족이다. 우리는 그동안 흉노와 흉노의 서진, 즉 유럽 훈과의 관련성에만 주목하였다. 저자는 훈족 일파는 유럽으로 서진하였고, 다른 일파는 남진 및 남서진하였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훈은 백훈이라고 불리는데, 키다라 왕조와 뒤를 이은 에프탈 왕조가 훈계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6세기 중반 돌궐 제국이 나타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 이란, 북인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아래의 표를 통해 훈계 집단의 확산과 기나긴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훈의 기원으로서 흉노 제국의 역사를 죽 훑어본 후 북흉노의 패망 이후 남흉노를 제외한 잔여 흉노 세력이 어떻게 집단 정체성을 유지한 채 이동하면서 서서히 발전하여 유럽 훈과 아시아 훈으로 변모하였는지를 차근차근,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중국의 흉노 역사에서 저자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남북조 시대를 개창한 유연과 이후 그들의 후손, 그리고 혁련발발과 저거씨의 왕국도 모두 흉노의 틀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 역시 다른 학자들과 차별점이다. 그에 따르면 흉노는 동과 서 양쪽에서 모두 당대의 대제국을 무너뜨린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서양사에서 훈의 역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마의 멸망이라는 크나큰 사건이 더욱 주목받기 때문이다. 훈족은 그저 태풍과도 같은 일종의 재해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들은 난데없이 쳐들어와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가 아틸라 사후 갑자기 소멸하였다는 인식. 저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됨을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훈은 재해가 아니라 이후 유럽사를 근본에서 뒤바꿔놓은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요컨대 훈 집단의 영향력과 지리적 범위, 그리고 정복은 진정한 유라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들은 도달한 모든 곳에 매우 혼종적인 내륙아시아 문화를 도입했고, 방대한 인구의 문화와 운명을 급진적으로 바꾸었다. (P.297)
저자가 제시하는 훈의 정치적 유산을 들어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유럽의 정치 구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잠깐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 훈이 아니라 오도아케르라는 용병대장으로 기억하는데, 하는 이견이 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는 훈계 집단이다. 이어 중세 유럽의 시초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는 아틸라의 봉신 출신이다. 중세 유럽의 특징적인 정치, 사회 제도인 봉건제 역시 훈족의 유산이다. 강력한 사회 및 군사제도는 게르만족의 각성을 이끌어서 국가 형성을 촉진하였고, 기마 중심의 군대 전통은 중세 유럽의 기사도와 승마 문화로 이어졌다. 이 정도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다. 기존에 내가 익히 알던 세계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편향적이었는지 새삼 부끄럽다. 게다가 훈계 집단이 남긴 문화적 영향은 또한 어떠한지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틸라 사후 훈의 미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오직 사라질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7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있는데, 아틸라 제국은 곧바로 분열과 해체를 겪은 게 아니라 동쪽 절반은 여전히 굳건한 세력을 유지한 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불가르 훈이라고 불리면서. 그러면 동부 아틸라 제국은 서부 아틸라 제국이 붕괴하는 걸 왜 방관하고 있었느냐는 의문에 대해 동부 초원의 새로운 유목 세력에 대응하느라 여력이 없었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어찌 되었든 불가르 훈은 100여 년을 존속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는 캅카스 훈이라는 별개의 지파가 역시 국가를 형성하였다. 훗날 아바르인들의 점령으로 훈족 국가가 무너질 때 이를 훈의 최후로 볼 것인지 저자처럼 훈과 아바르의 결합으로 볼 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양분된 아바르 제국의 한쪽이 나중에 불가리아로 이어졌다는 후일담은 흥미롭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존 훈족에 대한 견해와는 여러모로 다른 참신한 견해를 쏟아놓는다. 이것이 백 퍼센트 사실일지 여부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한다. 다만 여태껏 주목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훈족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만도 큰 공헌이다.
훈의 역사를 이해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점으로 저자가 거듭 강조한 사항이 있다. 흉노와 훈은 이미 자체로서 혼합적 민족과 문화, 종교 집단체다. 따라서 단일한 인종 내지 민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자의 연속성은 정치, 문화적 동질성, 즉 흉노식 가마솥과 편두 풍습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훈족보다는 훈계 집단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훈을 하나의 민족이나 종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집단은 종족과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한 부류가 함께 소속된 복잡한 정치체로, 그 안에서는 매우 다양한 생활 양식과 관습으로 인한 문화적 융합과 변용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P.17)
흉노와 훈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것은 두 집단 사이의 ‘유전적’ 연결고리가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유산의 전달이다. (P.19)
훈계 집단의 문화적 영향력과 관련해서 당대 중앙아시아가 후진적인 지역이 아님을 저자는 역설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주민 문화 기준으로 볼 때 유목민은 후진이라는 편견을 지니는데, 그들은 농경과 유목 문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두루 체험하면서 두 문명의 혼합과 교류를 통해 한층 빼어난 발달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예술 연구자나 중앙아시아를 잘 알고 있는 고고학자들 가운데 ‘원시적인’ 훈 사회라는 정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오히려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내륙아시아의 고고학은 게르만 시대 유럽의 예술과 물질문화가 초원의 예술과 물질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291)
8백 년 후 몽골이 세계를 뒤흔들어놓기 훨씬 이전에 흉노/훈계 집단은 후대가 이룬 것과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니 고립되었던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역사적, 지리적 단위로 묶어놓았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그들의 등장과 유산은 유라시아적 현상이라 불릴 만하다. 이 책은 흉노/훈의 역사적 소임과 부침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대단한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