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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평점 :
<수록작>
실종
늙은 보모 이야기
대지주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
궁금하다, 사실인지
<회색 여인>에 이어 개스켈의 다른 고딕 소설책을 읽는데. 수록작 중 <늙은 보모 이야기>만 중복될 뿐,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작품이다. 전자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수록작 중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가 제법 분량이 길다.
<실종>은 옛날에 발생했던 수수께끼 같은 실종의 몇 사례를 소개하고 작가 당대에서는 이런 실종의 두려움을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형사 경찰의 시대’에서는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를 당국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작가의 어투는 다소간 희화적이다. 가벼운 고딕 정도에 가깝다.
<궁금하다, 사실인지>도 역시 고딕보다는 환상 소설 유형이다. 서두는 그럴듯하다. 칼뱅의 누이가 잉글랜드의 사제와 결혼하였고, 후손 중 한 명이 족보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낯선 땅에 길을 잃다가 한밤에 우연히 어떤 성에 들어가게 된다. 우연과 오해가 낳은 묘한 경험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도 함께할 수 있는데, 서양 동화 애독자라면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분을 추리할 수 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등등.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설정이라고 하겠다.
많은 재산을 지닌 젊고 잘생긴 신사. 영화나 드라마라면 분명히 재벌집 상속자 정도의 신분일 것이기에 뭇 여성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지사다. <대지주 이야기>에서 지주 노인의 딸이 캐서린이 야반도주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독자에게 찝찝한 뒷맛을 계속 풍기는데, 그 신사의 외모에서 사악한 냉정함이 풍긴다든지, 그에 대한 프랫 부인의 이유 모를 반감과 의심이 그러하다. 어쨌든 당대에는 노상에서 임대료를 수금하는 신사가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 양자가 선량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식들이 반드시 부모를 닮는다는 보장은 없다. 꼿꼿한 거목에도 굽은 나뭇가지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많은 부모는 자신들의 육아와 훈육의 잘못을 탓하지만 그게 어디 반드시 부모 탓이겠는가. <굽은 나뭇가지>의 네이선과 헤스터 부부도 마찬가지다.
소박하고 순박하며 선량한 농부로서 나날의 삶에 감사하며 아들 벤저민과 친척 아가씨 베시가 결혼하여 자신들을 잇는다면 더없이 만족스럽게 노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아들을 지주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일자리를 구하러 런던으로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벤저민이 선량한 아들로 남아있었을까. 부모의 전 재산을 거리낌 없이 요구하고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는 아들. 어차피 상속받을 거니까 미리 받아서 어떻게 쓰든 자기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식. 오늘날 많은 부모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 눈멀어서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식을 수렁으로 밀어 넣는 데 한몫한다. 한 가닥 희망에 의존하면서.
물론 이 소설에서 벤저민은 너무 나아갔다. 그는 패륜에 해당하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죄악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가 보고 겪고 배우고 본받은 세계는 정정당당한 노력과 성실한 땀의 가치와는 무관한 곳이었으므로. 자기 집에 든 강도 중에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내 아들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이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어요. 이 늙은 여인이 조카에게 도와달라 외치니까 소리 지르는 걸 멈추지 않으면 목을 잡으라고 소리치더라고요. 자, 이제 진실을 알았네요, 진실을. 그러니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지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겠습니다.” (P.328)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투리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아무래도 시골 농부 가족의 지역성과 순박성을 두드러지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하겠다. 이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묘미의 체득이 한층 어렵다.
나머지 두 작품 <빈자 클라라 수녀회>와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는 모두 ‘저주’를 다루고 있다. 양자 모두 서두에서 역사적 일화를 연계하고 있는데 서사의 사실성 여부는 알 수 없다. 전자는 저주의 극복, 후자는 저주의 실현으로 상반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고딕 장르에서 저주는 비극과 공포를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잘못으로 죄 없는 후손이 당하는 비극이 전개된다. 저주의 연좌제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마련인가.
역사상의 위인이 내린 저주의 영험은 과연 극복 불가능한 것인가. 여러 대가 지난 후에도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현되는 저주를 우리는 숙명으로 체념해야만 할지 애매하다. 여기서 인간 이성은 아무런 역할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언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계모가 현명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오언의 비밀 결혼에 대해 오언의 아버지가 맹목적 분노를 퍼붓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이 필연처럼 외줄타기로 중첩되어야만 실현되는 저주.
오언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었어요.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P.245)
안타까운 건 귀여운 아기와, 개심한 네스트, 그리고 오언이 이룬 단란한 가족의 한때가 무참하게 깨져버린 비극이다. 아기를 잃고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린 오언. 한 무덤에 누이고자 하는 화해의 바람은 비웃듯 스러지고. 그의 운명은 비바람 치는 바닷속에서 사라져간다. 저주가 실현되었으니 앞으로 더는 비극이 없으리라. 그리피스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빈자 클라라 수녀회>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복잡한 이야기다. 지주 부인의 유모인 브리짓과 딸, 그리고 손녀로 이어진 저주의 흐름이 작품의 핵심이다. 첫째 장, 퇴락한 지주 집안에서 홀로 궁핍한 삶을 버티며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는 늙은 브리짓. 그에게 있어 딸이 키우던 강아지는 유일한 위안이자 가족이요 친구이다. 그래서일까 강아지를 죽인 신사를 향한 그녀의 저주는 혹심하기 이를 데 없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유일하게 사랑하는 생명체가, 아, 인간이, 죽어버린 내 불쌍한 아가만큼 순수하고 다정한 그 인간이, 차라리 죽음이 행복한 것일 정도로 모두에게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바로 이 피의 이름으로!” (P.114)
작품의 화자는 둘째 장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잘나가는 청년 변호사가 우연히 시골에서 낯설면서 아름다운 루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은둔하며 지내는 아가씨.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화자는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알게 되는 끔찍한 진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악마의 형상을 한 루시의 몸서리칠 정도로 사악한 육신. 그것은 바로 저주다.
모름지기 저주를 풀려면 원인 제공자와 저주 당사자가 만나야 한다. 화자의 활약 덕택으로 사실 관계가 밝혀진다. 그리고 브리짓과 루시 아가씨도 상면한다. 자신이 건 저주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피붙이임을! 저주의 중도 해지는 어렵다. 저주는 끝장이 나야만 끝나기 마련이다. 브리짓은 클라라 수녀회에 들어가 속죄와 참회의 세월을 보낸다. 브리짓의 기도와 노력에도 루시의 저주는 계속된다. 성직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브리짓의 저주를 실현해 준 이는 진실한 성자가 아니라 악마의 힘이었음을. 그리고 브리짓에게 깃든 악마가 그녀의 참회와 고해성사를 계속 방해하고 있어서임을.
분노에 찬 어휘들과 복수의 다짐, 그런 식의 신성하지 못한 기도는 결코 성자들의 귀에 가 닿을 수 없는 법이죠! 다른 힘이 그 말들을 차단하고, 하늘을 향해 던진 저주들이 그녀의 피붙이에게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사랑의 힘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으스러뜨린 겁니다. (P.176-177)
결말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저주를 건 당사자의 뼈아픈 고통과 헌신과 희생이 있고 난 뒤에야 루시 아가씨는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작품을 단순히 고딕 문학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함의가 매우 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과 영혼의 다양하고 복잡하여 심원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어서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작가 개스켈의 고딕 문학을 향한 관심이 상당히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표면상 이성을 벗어나 조그마한 계기와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감추어진 비이성과 환상에 매혹된다. 고딕 같은 환상 문학은 이성과 비이성의 양면을 파악하여 인간성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장르 문학으로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나 개스켈처럼 뛰어난 글쓰기 솜씨를 발휘하는 작가의 경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