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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녀였을 때 - 샬롯 퍼킨스 길먼 단편소설집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장지원 옮김 / 더라인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수록작>
내가 마녀였을 때
몰리의 의식
엄마의 자격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
정숙한 여인
전화위복
과부의 힘
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은 동시대의 다른 여성작가보다는 여성주의 의식을 더욱 강하고 확실하게 지닌 작가다. 앞서 읽은 <누런 벽지>와 <전화위복>(또는 ‘변심’)를 보면 알 수 있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다른 단편소설은 물론 <허랜드> 같은 장편의 존재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 책은 길먼의 주요 단편소설 모음집으로서 작가의 여성주의 문학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마녀였을 때>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우연한 계기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흑마법의 능력을 갖게 된 화자가 법적으로 처벌 불가능하지만 좋은 사회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저주를 내린다. 따분한 사람들, 위선자,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신나게 마녀의 능력을 발휘하던 화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대상의 성격을 바꾼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빈다.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갖고 있던 마법 능력마저 상실한다.
모든 여자가 마침내 여성성을, 여성성의 힘과 자부심, 삶에서의 위치를 깨닫기를 빌었다. [......]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고 충만한 삶과 일, 행복으로 뛰어들기를 빌었다. (P.30)
법망을 넘나들며 사회악을 처벌하는 의적의 활약에 감탄하는 통쾌함과 동시에 여성성의 사회적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임을 작가는 동시에 보여준다.
여성주의의 본질과 관련하여 초창기에는 남성의 가치를 높이 보고 남성에 가까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몰리의 의식>에서 알 수 있다. 진정한 여자인 몰리는 남성을 지향한다. 그녀가 바라는 남성의 최고 가치는 경제적 자유와 안정에 있다. 오늘날 많은 외벌이 가정과, 못지않은 맞벌이 가정에서도 주된 수입원은 여성보다는 남성에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역할의 차이가 아니라 예속 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견해는 여전하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소망하는 바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세상이 몰리 앞에 펼쳐졌다. [......] 남자가 만들고, 남자가 살고, 남자가 보는 남자의 세상이었다. (P.37)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미덕을 가르쳤다. <과부의 힘>은 이에 대한 반론이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인 자식들은 남은 재산과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한다. 경제적 여유와 봉양 의무를 놓고 가족 간 낯 붉히는 일은 현대사회도 비일비재하다. 남은 부모가 재산이 별로 없다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말고 끝까지 움켜잡으라는 조언도 있지 않는가.
“전에는 한 적 없던 일을 할 거야. 난 살 작정이다!” (P.147)
“너희 어머니가 자신의 관심사가 있고 인생이 앞으로 절반은 더 남은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으면 좋겠구나.” (P.148)
여기서 맥퍼슨 부인의 반전이 뒤따른다. 남은 재산은 부인에게 이미 소유권이 이전되었음과 그녀가 불린 재산의 절반을 갖고 혼자서 살며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 주장이라고 해야겠다.
여성에게 모성애는 불가피한 속성이다. 여성의 삶을 모성애로만 주장할 수 없지만, 극단적 편협한 모성애가 아닌 건전한 모성애는 시대의 간극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유효하다. <엄마의 자격>은 모성의 가치에 대한 일종의 담론이다.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전형으로 양자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털 하나 뽑지 않을 거라고 맹자에게 비난받는다.
엄마의 의무는 자기 자식이야! 에스더는 다른 가족을 돌보느라 자기 자식을 방치했어. 주님께서 에스더에게 다른 애들을 돌보라고 주신 적이 없잖아!” (P.60-61)
자기 아이를 희생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바람직한 행동 선택과 가치는 무엇인가. 다른 사안이지만 자율주행차의 윤리적 딜레마와도 비슷한 선택이다. 우리는 엄마의 자격이 없는 엄마라고 에스더를 비난해야 마땅한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작가 나름의 해법 제시다. 전자에서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줄리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 육아에 쩔쩔매는 상황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모성을 이유로 모두가 불행한 처지를 감내하라는 요구는 무리해 보인다. 다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대안이기에 현실성이 부족한 느낌도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온전한 이해, 시어머니의 뛰어난 육아 능력과 의사. 현대사회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어느 가정도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정숙한 여인>과 <전화위복>은 작가가 지향하는 여성주의 해법이라는 생각이다. 양자 모두 남편은 윤리와 책임을 저버리고 가출하거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와 초래할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것을 이해받길 기대한다.
전자에서 메리는 전남편의 방문을 받고 자신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심사숙고한 후 그를 거절한다. 후자에서 매로너 부인은 남편에게 오히려 남인 듯이 응대한다. 부부간 관계는 사랑과 신뢰가 결합한 사이며, 일방이 우위와 지배, 다른 일방이 복종과 피지배의 관계는 아니다.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인상은 아마 메리가 아닌가 싶다.
건강했고 자기 일을 좋아했으며, 마을에서 존경과 호평을 받는 인물이자 자유주의 교회, 진보적인 여자 모임, 도시 개선 협회의 유능한 구성원이었다. 메리는 평온, 안전, 평화를 거머쥐었다. (P.101)
<누런 벽지>는 그런 점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성 이해에 실패한 사례이다. 외견상 의사와 남편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처방을 사용한 것이며, 아내의 예민한 신경에 무관심한 게 아니냐는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아내 역시 너무나 유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병세를 악화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작가는 “미치게 되는 사람을 구하고자 쓴 이야기”(P.184)라고 밝히는데, 부적절한 요법에 대한 비판을 벗어나 여성주의의 전형으로 간주한다면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의견으로 참다운 여성주의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성성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여성성의 가치를 되살리고 남성성과 동등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남성성을 공격함으로써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편적이며 교각살우에 가깝다. 진정한 여성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