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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하나
윌라 캐더 지음, 정선우 옮김 / 아토북 / 2020년 11월
평점 :
이 소설은 지방주의 작가로 알려진 윌라 캐더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작품이다. 네브래스카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지역색이 두드러진 대표작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지역을 배경 삼는다. 주인공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나의 안토니아>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 또는 그의 관구 내에서 삶을 꾸려나간다. 더 넓고 더 큰 꿈을 향해 지역을 떠나고자 하는 이상을 품지 않는다. <우리 중 하나>의 클로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고향에서의 삶에서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기에 유럽의 전쟁터에 자원한다.
주인공 클로드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양분된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를 체격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범하거나 낮은 수준으로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가 주립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만 거기에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신학대학에 보내는 판단이 그렇다. 어머니 휠러 부인은 모순적이다. 그녀는 클로드의 마음속에 가진 한 가닥 불꽃의 존재는 의식하지만, 그것의 의미랄까 중요성은 둔감하다. 기독교에 푹 빠져 있는 그녀의 정신세계는 종교와 남편의 의사 양쪽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뿐 자신의 독자적 판단은 거의 없다.
반면, 가족이 아닌 주변인들은 클로드를 높이 평가한다. 주립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 부인인 에를리히 부인과 그녀의 사촌 슈뢰더-사츠는 클로드가 “완벽한 사윗감”(P.64)이며, 결혼시킬 딸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글래디스는 이니드보다도 클로드의 가치를 더 높이 알아차린다. 그녀는 클로드가 이니드와 결혼함으로써 다른 많은 남자처럼 생활의 함정에 빠져버릴 것을 우려한다. 자기 형이 글래디스를 염두에 두지만 않았더라도 클로드는 글래디스와 결합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며, 이때 그의 미래가 어찌 변했을지 알 수 없다.
보람 없고 평범한 농장일, 괴로운 침묵을 안겨주는 가족,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속에 클로드는 괴로워한다. 자신에게 내재한 발전과 성취의 욕구, 인생에서 뭔가 의미 있고 중대한 것을 찾으려는 욕망에 그는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래? 난 가끔 딱 한 번뿐인 인생에 엄청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아.” (P.56)
“난 아직 만족감을 주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나도 분명히 뭔가 잘할 텐데.” (P.140)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시도인 이니드와의 결혼도 행복하지 못하다. 존중과 공경을 하지만 결코 애정은 없는 두 사람의 관계. 게다가 이니드는 머나먼 타지에 기독교 전도를 하겠다는 강렬한 꿈을 품고 끝내 언니를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난다. 이후 그녀는 클로드의 기억 속에 단 한 번 나타날 뿐 더 이상의 존재감을 보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방관하던 미국은 마침내 참전을 결정한다. 클로드는 망설임 없이 군입대를 자원한다. 답답한 현실 탈출과 삶의 의미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4장부터의 후반부는 전쟁소설에 해당한다. 미군을 프랑스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항해 장면, 나름대로 저마다의 이상과 모험을 꿈꾸며 지원한 각 지방의 여러 청춘. 열악한 선상 생활에서 질병으로 미처 시도조차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들. 그 속에서도 클로드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옳은 선택을 하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마치 세상이 계속 커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자신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 같았다. 다른 동료들이 병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배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302)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여타의 반전문학과는 궤를 달리한다.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레마르크와 달리 캐더는 전쟁의 잔혹감과 무의미함을 기술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클로드와 게르하르트는 진지한 우정을 쌓아가며, 수녀원 터에서 적십자 활동을 하는 올리브와의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삶의 행복과 슬픔을 깨닫게 한다. 클로드의 깨달음은 차라리 삶의 달관과 해탈에 가깝다. 인류사적 거대 인식에 도달한 듯하다.
이상은 구시대적이고, 아름답지만 무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진정한 인간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는 운명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P.408)
임시 중대장이 된 클로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버텨내고 매우 위험한 진지를 사수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 클로드. 강력한 포격과 무자비한 총격 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지켜내리라 다짐한다. 끝내 그는 전우들을 향해 공허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인간의 최대 공포인 죽음을 초월한 행위는 독자에게 언제나 감동적인 전쟁 서사에 해당한다.
코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만 느꼈다. 자신이 이 훌륭한 사람들을 지휘했다는 것을. 데이비드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예상한 그들에게 지원을 왔고, 그들은 모두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죽기 전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순 없었다. (P.442)
실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작가이기에 전쟁과 전투의 생생한 묘사와 박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전쟁 속 인물과 전투는 다른 의미에서 관념적이고 사색적이다. 비난조가 아니라 그 속에서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이 찾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셈이다. 그의 삶과 인식이 밟아온 길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는 잘못된 길을 따라가서 귀중한 시간을 버렸고, 불행을 충분히 목격했지만, 마침내 올바른 길로 돌아왔고, 그 누구도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P.302)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23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캐더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하기엔 논란이 있는 작품임에도 그녀에게 수상의 영예가 부여된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지닌 전쟁 속 주인공의 긍정적 지향성에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전으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애국심 고취와 전쟁에서 삶의 의의를 발견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이야말로 미국 사회가 바라 마지않던 인물상과 주제 의식 아니겠는가.
클로드가 단연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여러 주변 인물의 거취도 궁금하다. 작중에서 동생에게 그토록 경멸받는 베일리스는 어찌 살고 있을까. 형 클로드에게 자극받은 랄프의 삶은 어찌 변했을지. 중국에 간 이니드는 행복할까, 정년 클로드를 그리는 마음이 일도 없는가. 유일하게 클로드의 가치를 알아차린 글래디스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에를리히 부인네 가족의 그것과 함께 매우 궁금증을 자아낸다. 클로드를 잃은 휠러 부인과 프랑스에서 고군분투하는 올리브 쿠르시는 어떤가 등등.
워낙 좋아하는 작가의 대표작이지만, 솔직히 읽을지 말지 고민하였다. 워낙에 번역 품질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아서였다. 캐더의 대표작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 한번 부딪쳐 보자는 투쟁심, 어찌 되었든 국내 초역인데 뛰어난 후속 번역본을 언제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 등이 겹쳐 그럼에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읽기 잘하였다는 것. 지적대로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점이 두드러지며, 이따금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단락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글 분위기, 작가가 지향하는 작품의 성격 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적어도 일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견해다, 다만 구입 여부는 신중하도록.
이 번역본에서 도저히 요령부득한 대목이 있어 참고 차원에서 소개한다.
그들이 프랭크포트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글래디스는 클로드의 미적 대리인이었다. 남자가 너무 깨끗하거나, 옷차림과 예의범절을 따지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점에서 나무랄 데 없는 소녀를 뽑아 같이 라틴어를 공부하고 실험을 한다면, 그녀의 개인적인 매력은 전부 그의 공로였다. (P.113)
그[로이스]는 자신이 클로드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방대한 경험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비참함처럼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곳에서 고군분투했다.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