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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안은 없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이 소설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주인공 오콩코의 손자 이야기다. 백인 식민 세력이 우무오피아를 점령하자 결연히 옥쇄를 선택한 오콩코. 어느덧 시대는 흘러 백인 식민 체제의 틀은 강고하고, 이보 족과 같은 아프리카인들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길은 대학 교육을 받고 고급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대학 학위는 현자의 돌이었다. [......] 실제로 봉급이나 문화적 설비의 불균형이 단지 이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유럽인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유럽인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P.136)
오비 오콩코는 부족의 도움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정부 장학생을 선발하는 나름의 영향력 있는 업무를 담당한다. 청탁과 뇌물이 오가기 좋은 자리다. 실제로 그에게 마크와 여동생의 장학생 선발 청탁 요청이 들어왔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몸이라도 바칠 각오다. 고등교육을 받고 나이지리아 발전을 위해 의기충천한 오비로서는 부정부패를 혐오한다. 그가 보기에 나이지리아 식민 정부는 온통 뇌물과 부정에 찌들어 있다.
귀국 선박에서 오비는 클라라를 만난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인 두 사람은 사랑의 미래를 약속하고 약혼반지를 교환한다. 이제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만 하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수 있고 행복한 꿈에 오비는 빠져든다. 당장 눈앞의 경제적 압박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기독교도인 아버지와 달리 오비는 서양 문화에 무조건 추종하지 않는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고유 전통과 문화를 사랑한다. 삶은 감자는 지겹다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 오비, 더럽고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라고스의 진면모를 포용하는 오비, 오만한 백인들이 외면하지만 나이지리아가 지닌 문화적 풍요로움을 인식하는 오비. 작가는 오비가 쓴 ‘나이지리아’라는 시를 두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 식민 치하의 조국 독립과 번영을 기원하는 심정을 여과 없이 내비친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을 언어가 없는 민족이라고 추정할 것이다. 그들이 지금 우무오피아로 와서 훌륭한 대화술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여기로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지배하에서도 여전히 삶의 즐거움이 파괴되지 않은 채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녀노소를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P.77)
작가는 오비의 상관인 그린 씨의 입을 통해 유럽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린 씨는 분명 아프리카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매우 단편적이고 시혜적인 경우에만 해당한다. 보편적 인식은 아프리카인을 타락하고 후진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고급 공무원 자리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평가도 무자비하다.
“뭣 때문에 교육을 받는 거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잖아. 날마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수백만 명의 동포들에 대해서는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단 말이지.” (P.171)
“내 주장은 항상 똑같잖소. 나이지리아에는 자기 나라의 공익을 위하여 약간의 권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까. 당신네 장관들로부터 대부분의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래.” (P.223)
그린 씨의 평가가 가혹하지만 문제는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음을 작가와 독자 모두 공유한다. 개인 영달과 부정부패를 왜곡된 식민 체제의 책임으로 전가하기는 무리다. 전통 사회도, 독립한 이후의 정부도 모두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료나 국민의 인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제고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음을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도 잘 알지 않는가.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오비에게 점차 시련이 닥친다. 어쩌면 일부는 예고된 곤란이지만, 나머지는 오비의 선택에서 비롯된 위기다. 약혼녀 클라라는 오수다.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라면 백정의 자식 정도의 사회적 신분이랄까. 인도 카스트제도에서 언급되는 불가촉천민이 차라리 유사하다.
“그래, 우리는 기독교도다.”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오수와 결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성명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잖아요.”
“얘야.” 오콩코 씨가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아는데 그래도 이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란다.” (P.193)
어머니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깊이 쉬었다. “난 이 문제에 대해서 너한테 단 한 가지 외에는 해 줄 말이 전혀 없구나. 그건 말이지, 그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란다.” (P.197)
오비의 말처럼 무지몽매한 선조들의 잘못된 문화, 타파해야 할 악습임은 사실이다.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독실한 기독교도인 부모라면 이따위 것은 가볍게 치부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충격적이다. 오비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친구와 가족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오비에게 실망하게 된다. 부모의 반대가 심하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무기력하게 변변한 저항 한 번 못 하고 포기한단 말인가.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공무원인 오비라면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의지로 결혼을 감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클라라가 실망하고 오비를 떠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의 말처럼 문제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은 주변이 아니라 바로 오비 자신이다.
한편 오비의 경제적 압박은 한층 심해진다. 고급 공무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 장학금 상환 분담금, 가족의 부양을 위한 비용 등도 벅차기 힘든데 클라라의 임신 중절 수술 비용까지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비용 부담은 그에게 치명타를 날릴 정도다. 잇따른 사건으로 자포자기한 오비는 스스로가 경멸했던 행동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때 오만할 정도로 청렴결백하기는 아주 쉽다고 선포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뇌물 논리를 가볍게 취급하는 친구를 이해 못 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나이지리아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품은 오비가 뇌물을 수수하고 단속에 걸려들어 재판받는 처지에 놓인다.
왜 그랬을까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박학다식한 판사는 교육받은 젊은이가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 문화원 직원도, 심지어는 우무오피아 사람들도 알 수 없었다. 또한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그린 씨 역시 알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P.246)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비의 타락을. 그건 개인 차원인 동시에 사회적 단위의 사안이 첩첩이 꼬인 결과이므로. 사회 변혁은 한두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움에도 우리는 흔히 슈퍼맨을 기대한다. 게다가 그것이 한 가족의, 한 가문의, 한 부족의 염원이 담긴 결과라면 그 당사자는 거미줄에 옴짝달싹 못 한 채 걸린 가엾은 희생물에 불과하다. 고급 공무원 오비는 자신의 교육과, 바람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오비가 시가 적힌 종이를 꾸겨 던져버리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시 속의 꿈과 희망은 현실에서 더 이상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두 명의 여인, 즉 클라라와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오비는 진정한 뜻에서 이미 죽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다. 그의 타락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체베의 이 소설은 식민 체제를 배경으로 한다. 고유의 문화와 체제를 갖춘 사회가 이질적인 세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식민지가 되었을 때 받는 충격과 갈등, 혼란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식민 체제에서 독립을 쟁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식민 기간이 길면 길수록 왜곡된 체제를 정상화하는 데 큰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작품 해설에서 밝혔듯이 포스트식민주의 극복은 작가 아체베의 나라 나이지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