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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존 르 카레를 알게 된 내가 다시금 그의 여러 소설 중 이 책을 선택한 까닭은 역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되어서다. 이른바 카를라 삼부작의 마지막 소설로 굳이 앞의 유명한 작품들을 제쳐놓고 굳이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가 궁금하였다.
르 카레의 연관 검색어인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는 “처음부터 늙은 스파이의 레퀴엠”(P.454)으로 기획하였다고 밝힌다. 왕년에 명성을 날리던 그러나 지금은 은퇴한 늙은 스파이가 지친 몸을 이끌고 일선에 다시 등장한 것은 오랜 공작원인 늙은 블라디미르 장군의 살해 때문이다. 블라디미르의 살해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소련의 스파이 대부 카를라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 블라디미르는 그 증거를 확보하고 스마일리에게 알리려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제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문턱을 넘어선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역경을 헤쳐 나온 인생 말기에, 우천으로 순연된 삶의 경기장으로 돌아가 마침내 끝을 맺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P.171)
이로써 양 진영의 두 늙은 스파이 대부의 정면 대결이 불가피해졌고, 물론 이 소설은 주인공 스마일리의 관점에서 서사가 전개된다. 시리즈의 앞선 작품을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에 해당 소설을 읽었다면 이 작품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모르더라도 전반적 이해에 곤란하지는 않다. 카를라가 스마일리의 맞수라는 것. 카를라의 공작으로 영국 정보부는 크나큰 위기에 처하였고, 스마일리의 활약으로 이중 스파이를 제거할 수 있었다는 것이 공적인 영역이라면, 빌 헤이든이 스마일리의 아내를 유혹하여 가정생활에 파탄을 나게 만들었다는 점이 사적인 영역에서 스마일리가 카를라를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이유였다.
먼저 읽은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르 카레의 글쓰기 방식은 사건의 외적인 기술, 행위의 직접적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스마일리는 행동파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관련 문건의 조사, 무엇보다 자신의 직관으로 제반 요소를 종합하여 번득이는 통찰을 내놓는다. 독자로서는 그저 스마일리가 준비하고 마련한 조치를 통해 사후에야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추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뒤늦게 무릎을 치며 탄복한다면 르 카레의 작품에 무한한 감동과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소설책을 덮는 게 서로 간에 유익하다. 나로 말하자면 대체로 흥미로운 편이지만 흠뻑 빠져들 정도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아냐, 카를라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야. 그저 미친놈일 뿐이라고. 언제가 그자의 종말을 위해 뭐든 해야 한다면 이번엔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겠어.” (P.296)
적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리가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 (P.422)
카를라는 작중에서 어마어마한 존재로 기술된다. 스마일리의 평생의 맞수이자, 스마일리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기에 “어둠의 성배”(P.182)라고 고백하는 인물. 그런 대단한 인물을 낚기 위해 치밀한 공작, 즉 설계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내게는 그게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진 것처럼 읽힌다. 스마일리가 카를라의 계략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언급했듯이 키로프 같은 인물을 대리인으로 쓰고, 오스트라코바에게 접근하는 미숙한 술책, 그리고리예프에게 알렉산드라를 돌보게 한 행동 따위는 전혀 스파이 마스터답지 않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허술하게 만들었을까. 숨겨진 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부성애? 자신의 공작을 절대로 서방에서 알아낼 수 없을 거라는 오만함? 그 또한 늙고 지쳐서 불가피하게 드러난 인간적 약점? 소련의 정세 변화로 위기감을 느껴 은근슬쩍 허술한 점을 노출하여 자신의 전향을 유도하게끔 하는 고도의 공작? 여기서는 어느 요인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내내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가는 왜 여기서 늙은 스파이의 레퀴엠을 기획하였을까. 소설 초반부에서 블라디미르를 둘러싼 스마일리와 다른 사람의 평가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냉전 시대 후기로 넘어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 소련 망명 집단의 효용가치 절하로 스마일리는 구시대의 인물로 취급받는다. 스마일리가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렇다면 카를라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는 위대한 스파이 마스터 두 사람의 명예롭고도 공식적인 은퇴식을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파리, 런던, 함부르크, 스위스 등지를 배경으로 전개되던 대단원의 무대가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에서 펼쳐진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민낯을 드러낸 카를라의 모습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건 비단 그림말뿐만은 아닐 것이다. “왜소한 사내”, “늙고 지쳤지만 너무도 지혜로운 얼굴”(P.448). 악의 탈을 쓴 것처럼 간계와 술책,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른 냉혹한 스파이치고는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 늙은 스마일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스마일리가 자신의 조국과 신념을 위해 헌신한 것처럼 카를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르 카레가 주장하듯이 냉전과 스파이 첩보는 동서 양 진영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였다. 상대방의 음모와 공작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도 불가피하게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조치와 공작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그것이 국가 안보와 국민 평화를 위해 필요악으로 용납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영국 정보부뿐만 아니라 그의 맞수였던 카를라 포함 적국의 스파이들 또한 같은 부류의 처지에 놓인 존재임을 역설한 셈이다. 그리고 스마일리와 카를라는 닮은꼴이기에 작가는 카를라를 광포한 악인으로 묘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밤새도록 거의 미동도 않은 채 자료를 읽었다. 카를라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까지 함께. 그러다 보니 때때로 둘의 삶이 서로를 보완하는 듯하고, 또한 똑같은 원인의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