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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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해설을 보면 이 작품을 쓰던 시기가 윌라 캐더의 개인사에서 매우 힘든 시기였음을 알게 된다. 가족과 지인의 잇따른 죽음, 오랜 거소에서의 원치 않는 이사 등.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상실과 기억이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도드라지는 젊은 여성의 얼굴로 채워진 겉표지. 영롱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또렷이 응시하는 모습은 바로 루시의 표상이다. 루시의 개인적 특성 자체는 현재, 여기보다는 미래와 저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화자도 수차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해버퍼드를 사랑하지만, 고향과 고향 사람을 벗어나려고 한다. 루시는 빛과 자유의 세계”(P.205)로 나아가고 발전하고 싶어 하는데, 고향은 정체와 속박의 표상이므로.

 

아주 오래전부터, 앞으로도 영원히!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복은 영원한 것이었다. 루시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사소한 일에 들뜬 것이 아니었다. (P.17)

 

루시가 서배스천에 매혹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뛰어난 예술가에게 흠뻑 빠진 여성의 사례는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무수히 많다. 더군다나 루시처럼 예술적 감성이 충만하며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성을 지닌 경우에는. 우리는 여기서 서배스천과 루시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의 사랑, 정확히 표현하여 중년남성과 젊은 여성의 사랑으로 깎아내려 생각할 필요가 없다. 루시의 사랑은 너무나도 뛰어난 예술에 대한 도취에 가깝다. 서배스천은 그녀를 이성으로 보다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 삶의 불꽃이 쇠잔해지는 시기에 삶에 활력과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두 사람의 포옹과 입맞춤은 에로틱보다는 친밀감을 풍긴다.

 

루시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내주는 기분이었다. [......] 무언가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 서배스천의 마음에서 루시의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지혜와 슬픔이었다. (P.94)

 

루시는 이상과 현실, 도전과 안주의 기로에서 전자를 선택한다. 그녀가 해리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작중 모두는, 아마 서배스천마저도 기쁘게 여겼을 것이다. 누구라도 두 사람의 결혼을 탐탁잖게 생각하거나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해리를 거절한다. 그녀의 마음 가득히 이미 서배스천과 그가 일깨워준 예술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기에 해리라는 현실을 수용할 여지가 없었던 탓이다. 루시는 적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오로지 전심전력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일말의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꿈과 이상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후 루시에 대한 해리의 반응과 태도를 두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자기 여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상대에 대한 배신감은 그토록 컸던 것이므로. 오히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에게 이전의 우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루시가 너무 한 게 아닐까. 차라리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고향마을은 좁고, 루시는 여전히 해리가 필요하였다. 특히 서배스천이 죽은 후에는 더더욱.

 

루시를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유학 생활이 가계에 얼마나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것인지 경시하며, 이를 완화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도 신경쓰지 않는다. 더욱이 언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언니 폴린은 고향집을 지키는 존재에 불과하다. 해리를 향한 심경과 태도로 이중적이다. 자신이 해리의 청혼을 거절하자마자 해리가 다른 여성과 결혼한 사실에 분개한다. 자기가 해리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자기와 해리는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해리는 그래야만 했다고 착각한다. 이처럼 그녀의 남다른 생명력과 활기는 다른 사람을 매혹시키지만 그녀의 이성과 사고란 측면에서 인간적 약점을 보인다.

 

,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 광휘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니 구하고 싸워 얻어야 했다. 그 속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192)

 

서배스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루시는 주저앉지 않고 서서히 벗어난다. 단지 추억과 회상에만 침잠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으로 뛰어들어 그가 남긴 영혼과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추구하고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욕을 품는다.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루시의 앞날과 예술은 어떤 변모와 발전을 이루어냈을지 안타깝다.

 

그리고 루시의 죽음으로 인생이 뒤바뀐 인물이 있다. 바로 해리다. 우리는 해리가 루시를 미워하지 않았음을 안다. 루시의 거절로 화가 났지만 결국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존재는 루시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봐 내보이지 않으려고 오히려 외면하고 남모르듯이 행동해야 했던 해리는 얼마나 딱한가. 그런 자신의 잘못으로 루시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해리는 여전히 루시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추억한다. 그건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루시만의 독특한 개성이 그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루시와 부부가 되었다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광휘로 가득한 삶이 되었을 것인가.

 

삶이란 부질없는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만사가 일말의 아쉬움 없이 성취된다면 후회는 남지 않겠지만, 더불어 추억도 회상도 없다. 사람은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에 더한 미련을 갖는 법이다. 그것이 귀할수록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해리는 루시를, 루시는 서배스천을, 서배스천 역시 자기 가족을. 그리고 해버퍼드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로서 루시를 계속 떠올린다.

 

작중에서 서배스천이 바리톤 성악가이고, 루시가 피아노 반주자로 나오기에 슈베르트를 포함한 클래식 성악 소개가 제법 많이 나온다. 음악적 배경지식이 있으면 작품 이해에 좀 더 유리할 것이다. 성악 가사는 소설 전개에 있어 미묘한 복선과 암시 역할을 하는 때도 있어 더욱 음미할 이유가 있다.

 

독특한 정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했던가. 이따금 빛나고 활기찬 대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은은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서를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제3부는 해리가 추억하는 루시로 온전히 채워져 있기에 이러한 분위기가 한층 짙다. 하지만 슬프고 비감 어린 정조로 빠지지 않는 건 그네들의 삶이 불의의 사고로 꺾였지만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한치의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일생을 불살랐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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