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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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캐더는 미국의 대표적인 지방주의 내지 지역주의 작가이다. 그녀가 어릴 적 거주하였던 네브래스카의 거칠고 황량한 자연, 개척민들의 평범한 삶을 위한 끈기와 노력 등은 작품세계의 핵심을 이룬다. 수년 전 읽은 그의 대표작 <나의 안토니아><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자못 감명 깊었다. 번역된 다른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 참에 근년 들어 몇 권이 새로이 출간된 걸 알았을 때 매우 기뻤다.

 

<로스트 레이디>방황하는 부인또는 길 잃은 부인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Lost Generation’과 흡사한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전통적인 시대 가치와 살고자 하는 개인으로서 뜨거운 열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방황하는 포레스터 부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면에서 표제는 적확하다. 최초의 번역본은 아니며, 아주 오래전에 도서출판 오상에서 <그는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렸다>라는 표제로 나온 적이 있다. 다만 그 책은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P.67)

 

이 소설은 20세기 초 서부 개척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척정신이 퇴색하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변하는 시대와 더불어 퇴장하는 인물과 새로운 세태에 재빨리 적응하여 번영하는 인물 군상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포레스터 대령과 포머로이 판사가 전자의 전형이며, 화자인 닐 역시 구시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들은 사리사욕보다는 명분과 양심을 중시하며, 고상한 품위가 스러지고 얄팍한 영리가 득세하는 현상을 수용하지 못한다. 은행 파산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인물들이라든가 아이비 피터스 같은 사람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캐더는 찬란했던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에 동정과 안타까움을 표출한다. 오늘날 미합중국을 완성한 서부 개척은 장엄한 낙조와도 같이 자신의 수명을 다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며, 그 아름다움과 미덕을 간직한 채 흘러갈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깊은 감정을 담아 문장을 서술한다.

 

실로 이것은 서부 개척시대의 끝이었다. 쇠의 힘으로 초원과 산을 다스렸던 남자들은 이제 늙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해졌으며, 심지어 성공한 이들도 죽음으로부터의 짧은 유예와 휴식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막이 내린 시대였으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P.194)

 

작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포레스터 부인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한다. 아주 빼어난 미모는 아님에도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개개인을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드는 능력은 선천적 재능이다. 그녀가 있기에 포레스터 플레이스는 방문객들이 항상 끊기지 않는 유쾌하고 따뜻한 집으로 인식되어 동경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이처럼 독자와 세인의 눈에 외양의 포레스터 부인과 내면의 그녀는 전혀 상반되기에 당황하게 된다. 부인은 부도덕한 가면의 여왕일까.

 

포레스터 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편과 같은 시대적 인물과 함께 우아하게 소멸하기를 기대하는 시각에서 그녀는 참으로 부도덕하다. 그녀는 표면적 고상함과는 달리 은밀한 혼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남편의 죽음 이후 아이비 피터스와 불건전한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며, 특히 어릴 적부터 그녀를 우상시하였던 닐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야생장미 다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그는 철조망 너머로 꽃다발을 던져 냇가 아래 가축들이 짓밟아 놓은 진흙탕에 버렸다. (P.102)

 

한편 포레스터 대령 부부의 결혼 생활은 과연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관계였을지 의문스럽다.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 플라토닉한 감정만으로 행복한 결혼이 존속하는 건 아니다. 육체적 관계 맺음을 사랑을 완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메리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대령에 대한 보은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성공한 중년남성이 주는 안정감을 선택했을 것이나, 만족스럽지 못함은 프랭크 엘리저와의 외도를 통해 드러난다.

 

포레스터 부인은 본성적으로 도회풍 여성이며, 사람들 속에서 화려함과 사교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나름대로 스위트워터라는 시골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겨울철마다 도회에서 보냈던 덕택이다. 대령의 파산으로 그녀는 연중 시골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건 그녀를 정신적 고통과 절망,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심정은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내년 겨울에도... 내후년 겨울에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 봐! 내가 어떻게 되겠니, ?”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의심할 여지 없는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P.92)

 

개척 시대의 화신이었던 남편이 죽고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처사일 수도 있다. 고대의 순장 풍속도 아니며, 지아비가 죽으면 평생 수절해야 하는 전통 유교 사회도 아니다. 아직 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살아갈 이유가 있다. 그녀라면 더더욱 생의 의지는 강렬할 것이다. 이것이 닐을 실망케 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곱게 늙어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살려는 힘이 내 안에서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진단다, .” (P.145)

 

이것이 그가 포레스터 부인에게 품은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녀가 이 위대한 남자들 모두의 과부를 자처하여 스스로를 제물로 희생하고 자기가 속한 개척시대와 함께 소멸되기를 거부했다는 것. 어떤 조건에서라도, 그녀는 살기를 원했다는 것. (P.194)

 

F. 스콧 피츠제랄드가 윌라 캐더의 팬이었으며, <위대한 개츠비> 속 데이지와 포레스터 부인과의 우연한 유사성을 밝힌 부록의 대목은 흥미로운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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