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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ㅣ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매우 유명하며 유전학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책은 이중나선 구조를 최초로 밝혀냄으로써 노벨상을 수상한 저자가 훗날 직접 쓴 이중나선 발견 과정의 수기다. 교양 과학서로서의 진지한 과학적 접근과 지식을 기대한다면 실망하기 딱 좋다. 저자가 당시의 메모와 기억 등에 의존하여 작성한 자신의 주관적 기록이다. 따라서 편향적으로 평가받을 일부 대목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에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치고, 공평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P.18, 머리말)
이 책의 묘미는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젊은 미국 과학도가 어떤 계기로 DNA와 유전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와 공동 연구자인 프랜시스 크릭과의 학문적, 인간적 관계 형성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재기발랄한 젊은 과학도는 24시간 학문 연구에 매진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사교모임, 취미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다른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 그들 역시 과학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간이기에 인간적 욕구를 배제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왓슨, 크릭과 더불어 이 책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 그들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인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X선 촬영의 전문가들인 그들이 제공한 사진 자료가 없었다면 왓슨과 크릭은 DNA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아니었다면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언젠가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였을 가능성도 컸다.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과 더불어 DNA 구조 발견은 결국 시간과의 다툼이었고, 왓슨과 크릭은 뛰어난 직관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이중나선을 먼저 찾아냈다.
프랜시스 크릭과 내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나는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 (P.5, 한국어판 서문)
사실 과학자로서의 활동과 업적은 왓슨보다 크릭이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DNA에 대해 접근하기 쉬운 이 책을 썼기에 일반적 명성은 그가 월등히 높다. 과학자로서 전문 연구에 매진도 중요하지만, 학문적 성과를 대중 과학서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도 탁월한 과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하겠다. 동료 과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도록.
화학 지식도 부족하고, X선 촬영기술도 약한 저자가 DNA 구조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 책은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하였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순전히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행운과 우연의 소산으로 판단하기 쉽다. 대충 알려진 내용을 상상하는 구조에 모형으로 끼워 맞춰 성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과학은 쉬우리라.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는 저자 자신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고, 나머지는 이 책에서 밝히지 않거나 간단하게 서술하였지만 저자가 내내 관련 사안에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의 정도이다. 그렇게 쉬웠다면 다른 뛰어난 과학자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겠는가.
이제 문제의 핵심은 염기들을 맺어주는 수소결합을 유지하는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P.193)
수차례에 걸쳐 반복되어 기술하였던 윌킨스와 로지의 갈등, 왓슨 본인과 크릭이 로지와 상대하기 곤란하였던 난감한 상황 등을 통해 로지 프랭클린은 계속 부정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말미에 왓슨이 썼듯이 남성 중심의 과학자 사회에서 그녀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지위와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당-인산 뼈대가 DNA 분자의 바깥조직에 위치한다는 주장에 저자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구조를 밝혀내고 X선 사진과 비교해 보니 로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상 공동 수상자 명단에 이름이 실렸을 것이다.
과학계라는 곳은 연구가 벽에 부딪혔을 때 흔히 여성을 단순히 기분 전환이나 시켜주는 존재로 생각하기 쉬운 곳이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고도의 지성을 갖춘 그녀로서는 용감하게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셈이다. (P.237)
평이한 과학 교양서이지만, 특히 후반부에 DNA 구조와 관련한 내용을 전개할 때는 유전학과 생물학에 관한 기초지식을 갖고 있어야 훨씬 이해가 용이할뿐더러 이중나선이 갖는 깊은 함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나는 DNA 구조를 설명하는 그림을 보더라도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문외한이기에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이중나선이 유전자 복제를 매끄럽게 설명하는 구조라는 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학자 사회는 학문적 열정에만 전념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임을 이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직 내 갈등, 장학금을 받기 위한 노력, 이성과의 교제, 사교, 연구성과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구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결과의 미공개 등 옮긴이의 말마따나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어 현실적인 동시에 차라리 인간적이다.
저자 왓슨은 과학행정가로서 명성을 쌓아오다가 노년에 지능을 인종 차이와 결부시키는 발언을 함으로써 과학계에서 몰락한다. 노벨상 메달을 팔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겪었다고 하는데, 수년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옹호함으로써 완전히 퇴출당하고 말았다. 유전학의 대가가 이런 황당한 논란을 일으키는 걸 보면 학문적 능력과 이성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여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