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이야기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삼우반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영문학사상 꽤나 악명높은 작품이다. 주된 이유는 작가가 말하는 속내를 파헤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주저주저하면서 이 책을 읽었을 때 의외로 그다지 이해 부득은 아니어서 놀랐다. 내 지적 수준의 뛰어남인지 아니면 완전한 무지의 발현인지 판단이 어렵다. 어쨌든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몇 자 끄적거려 본다. 오독이라면 어쩔 수 없다.

 

종교적인 타락에 대해서는 의복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소개하기로 했으며, 이것이 이야기의 본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문의 타락은 여담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P.230)

 

작가 당대에도 작품 이해에 어려움이 많았고 오해가 난무하였기에 오죽하면 작가가 직접 길라잡이 성격의 글을 추가하였다. <작품을 위한 변론>이다. 이 글을 읽으면 무질서하고 난삽하기 그지없던 이 책이 일순간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다가온다. 다만 자유분방한 문장의 재미가 사라지는 단점이 있다. 도대체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떤 의도로, 무슨 구성을 꾸미고, 여하한 표현을 하였는가 하는 긴장과 추리의 흥미진진함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독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해와 재미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작품 구성은 통 이야기여담이 엇갈려 짜여있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구성이 이해에 헷갈리는 독자라면 굳이 순서대로 읽지 말고 통 이야기만 한꺼번에 읽어도 좋다. 그러면 조금 더 이해가 용이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타락을 의복 우화로 비꼬아놓은 내용이다. 스토리가 흥미롭고 어려운 전개가 아니라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리기 쉽다. 의복으로 상징되는 신의 뜻을 삼 형제는 점차 달리 받아들이는데, 큰형 피터는 가톨릭, 잭은 개신교, 마틴은 국교회를 가리킨다. 물론 셋 중에서 국교회가 종교의 순수한 본질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는 주장인데, 당연하다, 작가 자신이 국교회 사제였으므로.

 

여담은 보다 이해가 어렵다. 특정 서사로 구성된 게 아니라 현대의 학문 타락을 자유분방하게 비판하는 논설 형식에 가깝다. 요지는 학문의 형식과 외형에 신경 쓰고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학문의 내용 자체는 부실하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자에 따르면 자신은 서문에 당대의 관례에 따라 타인을 비난하는 내용을 쓰지도 않는다. 그는 그네들의 매춘부 같고, 텅 빈 자질에 대해 진정한 비평가들에 경의를 표한다. 본문에 앞서 장문의 서문과 헌정사들을 도배하는 현대 작가의 행태에 비판적이다. 작가의 소재도, 주제도 공허하고 소진되다 보니 본문의 얄팍함을 메꾸기 위해 색인과 요약, 인용으로 풍부하게 보충하는 현상도 여지없이 까발린다. ‘결론은 파격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현재 우리 현대 작가들 사이에서 아주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 하나를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이다. 즉 무() 주제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이다. 주제가 완전히 고갈되어 버리더라도 그냥 계속해서 펜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P.223-224)

 

현대인으로서 이성과 지성을 갖춘 화자는 당대의 무분별한 학문과 작가의 글쓰기 행태를 이렇게 신나고 사정없이 그렇지만 예의범절에 맞게 비판한다. 이런 화자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도대체 타락하지 않고 온전한 학문이란 도대체 어떤 게 남아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한편 이렇게 냉철한 비판적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화자라면 당대의 참된 지식인이자 학자라는 존경심마저 들 정도다.

 

이렇게 화자에 깊은 공감과 지지를 표하는 와중에 뭔가 찜찜함을 느낀다면, 이 작품의 맥을 제대로 짚은 독자다.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자. 본문 외에 장문의 서문이 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존 소머스 경께 바치는 헌정사’, ‘출판업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 ‘존경하는 후손 전하께 바치는 서한도 달라붙어 있다. 화자는 분명히 작가와 출판의 이러한 행태에 비판적이었는데 이 작품도 비판의 대상과 동일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화자는 언행 불일치를 보인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식으로. 존경할만한 화자는 졸지에 사라진다. 오히려 화자야말로 허위의 가면을 뒤집어쓴 위선자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에 대해 중대한 착각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한 점. 작가는 화자를 비판한다. 당대 학문의 타락을 비판하는 화자의 타락한 실체를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써 독야청청을 외치는 학문적 위선 행태를 말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느끼는 혼란은 아마도 여기서 비롯하였으리라.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핵심은 통 이야기가 아니라 여담이다. 전자는 후자를 은폐하기 위한 바람잡이다. 작품해설에 이 점을 잘 밝혀놓았다.

 

작품의 화자가 반드시 작가 자신의 입장을 대표하는 대변인이 아니며 오히려 작가가 공격하려는 대상의 속성을 지닌 퍼소나 혹은 마스크로서, 사실은 작가에 의해 아이러니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그의 동류 집단까지도 공격을 할 수 있다는 퍼소나 수법이야말로 스위프트 풍자의 핵심이라는 사실 (P.274)

 

의복 패러디가 일차원적인 반면 여담 패러디는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럼에도 두 패러디의 지향점은 일치한다. 그 대상이 종교든 학문이든 상관없이 본질을 도외시하고, 표면과 가식을 중시하고 이성을 배척하고 광기와 광신에 추종하는 당대의 작태를 작가는 무자비하게 까발린다. 다름 아닌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가 아니던가?

 

이처럼 흥미롭고 통쾌한 책이 절판된 게 아쉽다. 나처럼 중고로 구하거나 아니면 동서문화사 판본을 택해야 하는데, 후자의 번역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으며, ‘작품을 위한 변론이 누락되어 있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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